여러분에게 김광규 시인의 ‘나’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보통 시라고 하면, 어려운 면이 있는데요. 이 시는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김광규 시인의 ‘나’입니다.
살펴보면 나는/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나의 아들의 아버지고/나의 형의 동생이고/나의 동생의 형이고/나의 아내의 남편이고/나의 누이의 오빠고/나의 아저씨의 조카고/나의 조카의 아저씨고/나의 선생의 제자고/나의 제자의 선생이고/나의 나라의 납세자이고/나의 마음의 예비군이고/나의 친구의 친구고/나의 적의 적이고/나의 의사의 환자고/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나의 개의 주인이고/나의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아들이고/아버지고/동생이고/형이고/남편이고/오빠고/조카고/아저씨고/제자고/ 선생이고/납세자고/예비군이고/친구고/적이고/환자고/손님이고/주인이고/가장이지/오직 하나뿐인/나는 아니다
과연/아무도 모르고 있는/나는 무엇인가/그리고/지금 여기 있는/나는 누구인가
이런 시라면 우리도 쓰겠지요? ㅎㅎ
시인이 말하는 나는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관계가 엄청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말하는 나는 또한 ‘아무도 모르고 있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라는 표현은, 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 라는 뜻이기도 하고,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나' 일 수 있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나’라는 시를 소개해 드린 이유는, 룻기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나오미 같기도 하고, 때로는 룻 같기도 하고, 때로는 보아스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러 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들 모습과 이들 관계 속에서 기가 막힌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어떻게 일하실까요?
우리가 맺고 있는 수 많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일까요?
룻기서를 통해 발견되는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보아스처럼 넉넉하고 배려 깊은 사람일까요?
나오미처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일까요?
룻처럼 헌신적이고 모험심 많은 사람의 모습일까요?
바라기는 성령 하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 여러분과 제가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지난 주에 우리는,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밭에 나가 이삭을 주우러 가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연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룻을 보아스 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보아스 밭에서 룻은, 보아스의 인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보아스의 축복과 배려로 룻은 원하는대로 이삭을 줍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룻은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보아스의 축복과 배려에 응답합니다.
이는 또한 그물처럼 얽힌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의 관계를 축복하시고, 보아스와 룻의관계를 축복하시고, 룻과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축복하신 결과는, 풍성함이었습니다. 이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7절: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 쯤 되는지라’
한 에바는 약 20킬로그램 정도 되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루에 룻이 주울 수 있는 보리 이삭의 양치고는 나무나도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몇 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하루 일했는데, 몇 주 식량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룻은 정말 행복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에바’는 룻에게 이런 경험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이 삶으로 증명된 경험.
모호했던 삶이 조금은 분명해지는 놀라운 경험.
비어짐이 채워지는 감사한 경험.
걱정과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는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한 에바의 보리” 같은 경험이 여러분과 제 삶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17절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적용해 볼까, 생각해 봤습니다. 특히 지금 제가 일하는 학교에서, 목사로서, 선생으로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저는 이번 학기에, 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의 문제로, 생활의 어려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학교 마당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게 밝고 빛나는 인생이, 그들의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졸업한 후에는, 그들의 일터에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그 기도와 축복과 함께, 제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어쩌면 가장 쉬운 것일 수 있는데, 아주 조금이지만 매달 얼마씩, 학교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보아스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룻)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일군들이 한 일은 룻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조금 버린 것이지만, 그게 모이니까 20킬로그램이 되었습니다. 와우~ 아닌가요!
그리고 룻처럼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제게 주신 기회에 최선을 다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이삭 줍는 인생. 그 인생은 고달프지만, 그 속에서도 풍성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놀라움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알게 되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17절에 나오는, 모압 여인 룻의 하루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망합니다. 저의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린 것이, 누군가에게 행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린 것이, 누군가에게 행복이 되고, 희망이 되고, 살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여러분의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일하는 학교에 버려 주셔도 됩니다. ㅎㅎ 그리고 지켜 보았으면 합니다. 한 에바의 기적이 일어날까? 하고 말입니다.
3.
룻은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도 시어머니에게 드리게 됩니다. 룻이 주은 이삭의 양도 엄청난데, 룻이 배불리 먹고 남겨 온 것을 보면서, 나오미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너무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읽어야 할 구절이 19절입니다.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나오미는 룻이 가져온 것을 보면서, 너무나도 궁금했습니다. 어디가서 일을 했는데 이렇게 많은 보리 이삭을 주워왔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누군가 은혜를 베푼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오미는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19절에 나오는 나오미의 말 속에는 ‘어디’ 라는 질문과 ‘누구’라는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룻은 어디에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시어머니에게 ‘누구에서 일했는지’를 말해줍니다. 룻은 왜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롯의 대답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본문 그 자체에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룻의 대답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어디’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어디’라는 장소도 있지만, ‘누구’를 위한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디에 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는데, 우리의 기도에 ‘누구’에 대한 기도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직장에 다니느냐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누구랑 일하느냐입니다. 직장에서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줘도, ‘사람’ 때문에 힘듭니다. 어디에서 밥을 먹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랑 밥을 먹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경치가 좋은 곳에 여행을 가도, 더 중요한 것은 누구랑 여행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번 주에, 전 세계로 여행을 하는 조종사에게 (누군지 아시지요?) 어느 나라가 제일 좋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한국, 독일, 일본 이런 나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 나라들이 좋냐고 했더니,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아하’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나라들은, 친구와 친척이 있는 나라 였기 때문입니다. 멋진 경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제가, 머리를 한 방 맞은 듯 했습니다.
어디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19절을 보시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룻은, 나오미의 질문에, ‘보아스’라고 간단하게 대답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룻은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이다 라고 길게 대답합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보아스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뜸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어머니, 오늘 누구랑 일했는지 궁금하시지요? 그러면서 룻이 5초 쉬고 하는 말이,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3초 쉬고), 보아스 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이름을 듣고 더 깜짝 놀랍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이름을 통해, 또 한 번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 내용이 20절입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먼저, 나오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축복합니다.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는 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축복할까요?
그 이유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역사와 정체성과 모든 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 그는 우리의 공급자 이십니다. 여호아 라파, 그는 우리의 치료자 되십니다. 여호와 살롬, 그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요엘 2:32)’ 여호와의 이름은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는 능력이 되십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든지 이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인자와 진실을 요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니다. 여호와는 모든 이름을 뛰어넘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다는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이름의 모든 의미로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는 예수님도 그들 중에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방인들을 제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능력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신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속에 담겨진 모든 의미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관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백성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를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4.
나오미는 보아스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설명합니다. 나오미에게 여호와는,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인애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여호와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폭풍이 불어도, 우리 삶에 고난이 있어도, 우리에게는 산 자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평강입니다. 또한 여호와는 죽은 자에게 소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은 너무나도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죽음 마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룻을 통해,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새롭게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전까지 나오미는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어떻게 살게 될 지 막막했습니다. 룻이 함께 오기는 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나오미에게 소망이 되어준 이름이 ‘보아스’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이런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 라는 이름, 나오미라는 이름, 룻이라는 이름, 그리고 우리의 각 자의 이름 속에서, 누군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꿈꿔 보자구요. 누구가에게 우리의 이름도, 작은 희망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이름 중에 높여야 하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보아스 이름을 통해 나오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자가 되어 있습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라는 말은, 나오미에게 희망입니다.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룻의 하루를 통해, 그리고 보아스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어떤 관계로 발전할 지,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오미는 어렴풋이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말해줍니다.
22절.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룻기에서 언급되는 소년들은 ‘보리를 베는 사람들’이고, 소녀들은 ‘베인 보리를 묶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보리 밭에는 소년들과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룻에게 소녀들과 함께 있게 했습니다. 혹시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가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이고, 젊은 여자이고, 과부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일을 미리 방지하라는 것입니다. 선제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라는 나오미의 부탁이었습니다. 기대했던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 지 모르지만, 나오미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룻의 반응이 23절에 나옵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 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룻은 나오미에게 순종했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단어가 ‘이에’라는 단어입니다. 나오미의 말이 잔소리로 들리지 않고, 지혜의 말로 들린 것입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화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되라고 하는 말인데, 꽹과리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의 말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룻의 행복했던 하루는 다음 날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사 양식을 주셨음을, 그 다음날도 룻과 나오미는 경험하게 됩니다.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의 시간은 7주라고 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약 두 달은 행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보리 추수와 밀 추수가 끝난 후에도 하나님은 이 두 사람에게 양식을 주실까요? 아니면, 이 모든 일이 우연히 그들의 삶에 일어난 일일까요?
하나님은 룻과 나오미의 삶을 어떻게 이끄실까요?
관계라는 그물 속에서, 기가 막힌 방법으로 나오미와 룻에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해도 될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도 인도하십니다. 2024년도는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이 뒤를 잇습니다. 2025년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해 주실까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설마 하고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을까요? 조심해야 할 것은 없을까요?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아무렇게나 되라고 자포자기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나요?
룻은 시어머니의 조언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매일 매일 룻은 처신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런 룻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룻의 삶이 기대가 되지 않으세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이런 희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이유는, 주님 만날 날이 더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살롬. 여호와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름을 우리가 찬양하기 원합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그 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