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국에 잘 다녀 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대부분의 시간을 전북 부안에 계시는 아버지와 보내고 왔습니다. 아버지랑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제가 어떤 사람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주 하시는 말씀과 아버지가 하시는 행동들이 있는데, 알게 모르게 제가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동안 잘 몰랐던 또는 깨닫지 못한 부분입니다. 물론 저는 분명 아버지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은연 중에 튀어나오던 제 말투나 행동 속에, ‘그냥 제 아버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잘 몰랐던 아버지의 연약한 부분도 보였지만, 만날 때마다 변화되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연로하셨지만, 아버지에게 저를 여전히 철없는 아이같다고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걱정해 주는 분이 있다는 것, 생각해 주는 누군가가 한국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또 몸으로 느낄 수 있던 여행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제가 없는 사이에, 여러 모양으로 수고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2.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찬양이 있습니다. 설교 후에 함께 불러 봤으면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찬양곡인데요.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짙은 안개 가릴 때/ 긴 터널을 지날 때/ 이 노래를 불러봅니다.
삶의 무게 힘들 때/ 두려움이 커질 때 / 이 노래를 불러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로 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네/ 나를 향한 놀라운 축복.
이 찬양곡은 에베소서 1장 1,2절이 배경이라고 합니다. 이 찬양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특히 삶의 무게가 힘들 때 두려움이 커질 때, 우리에게 경험해야 하는 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의 은혜와 평강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주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문입니다. 바울의 편지마다 등장하는 상투적인 표현처럼 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편지 속 배경을 알게 되면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위험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위험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위험합니다. 사람들을 바꿔 놓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바꾸어 놓습니다. 부모의 행동과 생각도 버리게 합니다. 특히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버립니다. 그러니 예수의 복음은 위험한 것입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삶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살라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유입니다. 그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히브리서에 나오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감옥은 실패의 자리처럼 느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남들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남들의 손가락질을 참아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억울하고 속상한 곳이기도 합니다. 나쁜 짓을 해서 감옥에 갔다면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길, 선한 길, 손해 보는 길을 가고 있는데, 그 결국이 감옥이라면 억울할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찬양 가사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습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갑니다.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잘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하는 짓인지 하는 생각도 들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했는데, 감옥에 갇혀 버린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살았는데, 감옥에 갇혀 버린 듯 실패와 좌절만 남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데, 삶이 허전하게 느껴질 때, 삶의 감옥에 갇혀 버린 듯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원망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까요?
잘못해서 갇힌 감옥이 아니라, 잘하려고 하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갇히게 된 삶의 감옥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갇힌 자가 갇히지 않은 사람들을 오히려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에게는 있었고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는 없었던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고,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는 위험한 존재인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짙은 안개 속에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짐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 속에 두려움이 커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지만,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 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부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소개해 드렸던 찬양이 제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불러야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는 노래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함께 기도했으면 해요.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되기를 말입니다.
3.
또한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 때문입니다. 사도 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보냄을 받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지만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담대함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이라는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긍심은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생길 때, 그 정체성 속에 자긍심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미국 사람입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자신을 소개할 때, 우리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정체성은, 나이와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나의 모습과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나의 모습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으면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으면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자기 마음대로 했다가, 욕심부리다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좋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다가 감옥에 갇혔기에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실패한 인생인가요? 감옥과 같은 고난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것인가요?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 감옥 같은 삶이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이면, 마음 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가 감옥에 있으나 얼마나 당당한지 말입니다. 감옥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우리 몸에 남는 상처가 있다면, 그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고생을 하더라도, ‘하나님 뜻’을 따르다가 생긴 일이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길 바랍니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그에게는 주님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 편지 안에서 느껴지는 열정이 있습니다. 저는 이 열정이 부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어도, 식지 않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도, 무엇인가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이 있었으면 합니다. 성경 책을 읽는 열정, 큐티에 대한 열정, 복음에 대한 열정,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열정, 기도에 대한 열정. 수 많은 열정들을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우리 각자에게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열정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열정이 있으면 눈 빛이 달라집니다. 열정이 있으면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감옥에 있어도, 사도 바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매일 아침마다 한 일은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약 한 시간 코스의 등산인데,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제게는 힘겨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올해 84세가 되시는데, 저 보다 더 빨리 걸으십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14년 동안 매일 같은 산을 오르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산으로 가시는 중에 차가 보이면, 저거는 누구 차, 이거는 누구 차 하면서 출석체크도 하십니다. 산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합니다.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좀 더 힘을 낼 수 있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14년동안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굴곡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버지는 14년을 한결같이 등산을 하셨습니다. 대단한 열정 아닌가요?
제가 이번에 알게 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집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에서 등산을 하시는 이유입니다. 집 근처에도 작은 언덕있고, 산책할 수 있는 곳도 많은데, 굳이 차로 20분이나 떨어진 산을 가시는이유 입니다. 제가 20분을 강조하는 이유는, 꾸준히 운동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20분이나 달려와서 산에 오르면 하산할 때까지는 반드시 걸어야 합니다. 시작하면 반드시 끝내야 집에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배운 게 있습니다. 기도는 집에서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굳이 와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교회까지 20분넘게 운전하고 왔는데, 1분만 기도하고 집에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피곤하고 힘들고 귀찮게 느껴지는 일도, 어떤 장소에 가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장소에 가면 우리의 열정이 발산될 수 있습니다. 매일 산에 오르는 것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열정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을 쳐서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를 가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열정은 감옥에 갇혀 있어도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평강이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열정은 감옥에 갇혀 있기에 또한 나타난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편지 쓰기는 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이 있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에게 있는 열정은 그가 가진 사명의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이라는 사명 의식이 그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명자와 비슷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성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라는 단어들입니다. 여기서 성도는 거룩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성도라고 부릅니다. 교회에서 형제 자매가 주 안에서 가족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성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구약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성도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나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지니라 (출 19:5,6)’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백성이 바로 성도의 기원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때,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거룩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성도라고 불러주신 것은, 그들의 생활이나 행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된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강조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는 누구일까요? 성도가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음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신실한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신 것에 대해 신실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신실한 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경험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에 감사해서 보여주는 반복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신실한 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신실하신 분들입니다. 이런 자긍심이 우리에게 생겼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성도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