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작품 중에 ‘두 사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이니까 실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소설은 한 가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에핌과 에리세이라는 두 사람이 성지순례를 떠나면서 생겼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핌이라는 사람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무슨 일이든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지 그는 동네에서 부유한 축에 속했습니다. 반면 에리세이는 특별한 것이 없이 평범하고, 사람 좋아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이 성지 순례를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가다가 중간에 우연한 일로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됩니다. 에핌은 성지순례를 계속하게 되고, 에리세이는 중간에 집으로 되 돌아와야 했습니다.
에리세이가 집으로 되돌아 오게 된 이유는 성지순례를 하려고 가져갔던 돈을 가는 도중에 다 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디에 돈을 썼냐가 소설의 내용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죽어가는 한 가족을 살리는데 거의 사용했습니다. 원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에리세이는 물 한 잔 얻어 먹기 위해 어떤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는 며칠을 굶어서 거의 죽게 된 한 가정집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른 척하기 그래서는 에리세이는 자기의 빵을 그들에게 나눠졌습니다. 그리고 거동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주었습니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그만인데,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어서 음식도 해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고자 하는 마음도 생겨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에리세이는 자신이 성지순례를 가려고 모은 돈을 거의 다 써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에리세이는 성지순례는 간 셈치고 집으로 되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성지순례를 하려고 했지만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에리세이가 돌봐 주었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가족의 뒷 이야기는 에핌이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알게 됩니다. 에핌은 에리세이가 도와준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에핌도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한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에핌은 그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에핌은 느닥없이 나타났던 그 사람이 에리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일 후에 에핌은 집에 돌아온 후에, 에리세이를 만나게 되는데요. 에리세이의 가정과 그가 한 일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우리 인간은 오로지 사랑과 선행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톨스토이의 ‘두 사람’이라는 소설을 읽으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고 있는 톨스토이의 고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에핌과 에리세이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있음직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두 사람’이라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고민들이 현대의 크리스챤들도 해야하는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질문을 현대의 크리스챤을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보돠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여러 작품을 읽어보면, 그 속에는 항상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성경을 읽으면서 고민하고 깨달은 내용들을 소설로 써서 그런 듯 합니다. 특히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하는 작은 선행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톨스토이가 깨닫고 말해주고 싶어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우리 인간은 오로지 사랑과 선행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에핌의 이 깨달음에 여러분은 동의 하시나요? 아니 톨스토이의 이 깨달음에 여러분은 동의하시나요?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 것을 지혜롭게 여깁니다. 따라서 에핌과 같이 자기 밥그릇 챙기면서 독하게 사는 사람이 인정 받습니다. 반면 에리세이 같이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옆에 있으면 좋다고 말하지만, 인정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기 밥 그릇도 다른 사람에게 퍼주기 바빠다며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려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고민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을 하는 이유는 주님의 가르침과 세상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갈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세상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관리를 한다는 말로 바꿔 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매우 이기적인 면이 있습니다. 저만 봐도 그렇습니다. 저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차하면서 후회를 하고 갈등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칼처럼 마음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유익을 구한다’는 의미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끝까지 달려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다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이세벨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합은 궁전 옆에 있는 아름다운 포도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포도원 주인인 나봇이 나합의 어떤 제안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조상때 부터 내려온 땅이라서 팔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은 가지고 싶은데 갖지 못하자 아합은 속도 상하고 답답해 하다가, 아예 침대에 누워 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하나님과 왕을 모독했다는 죄를 나봇에게 뒤집어 씌어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상은 이렇게 무서운 일도 저지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다가 이런 악한 일도 서스럼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즘 전 세계가 ‘미투 운동’으로 떠들썩 합니다. “나도 당했다”며 소설 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성적인 수치심을 받았거나 성폭력을 당했다는 내용을 소설미디어로 폭로하는 운동입니다. 어떤 일은 사실 관계를 따져볼 것도 있겠지만, ‘미투 운동’을 통해 어떤 사람은 창피를 당하거나 범행 사실이 들통나서 감옥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 사회적으로 존경 받고,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들이 벌인 일이라서 사람들이 받는 충격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긴 원인을 생각해 보면,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 가는대로 자신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제 스스로에게도 말해 줍니다. ‘너도 조심해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무슨 일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미투운동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들의 결국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은밀하게 자기 유익만을 취하던 사람들의 죄가 들어났을 때,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줍니다.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돌아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살피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갔을 때 가족 사진을 찍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 전 일인데요. 아마 저희 식구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해서 온 식구가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서, 저희는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동생이 찍은 사진 중에 잘 나온 것이라며 크게 확대해서 보내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잘 나오긴 했는데, 동생네 가족만 잘 나온 사진이었습니다. 다른 식구들은 관심도 없는 듯 했어요. ㅎㅎ 사실 자신들만 잘 나오면 정말 잘 나온 사진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일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주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나요? 자기 일을 돌아보는 것은 자기 관리라고 표현해 볼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유익만을 따지면서 살지 않을 자신이 여러분에게는 있으신가요?
4.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면 살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손해보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죄로 원수되었던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듣지 않아도 되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셨습니다. 그것도 철저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셨기에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자기 유익을 포기하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자기 유익을 포기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면 그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게 되고, 그것이 결국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에리세이처럼 사는 것이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처럼 사는 것이 옳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런 믿음이 우리를 순종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줍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나 대신 사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것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가정에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이유입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자녀들을 통해 큰 상을 받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았지만 아이들로 인해 생기는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로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남편과 아내로 묶어주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로 산다는 것도 자기 유익을 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는 것이 부부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여서 자기 욕심껏 하려고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면 이 땅에는 사랑이 퍼질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익만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피곤해집니다. 반면 우리가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다른 사람들도 배려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이 넘치는 가정,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우리 가정,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말세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1-2).’
우리들은 세상을 거스르면서 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