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본문은 잘 알려진 성경 구절입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암송하시는 구절이고, 좋아하시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먼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혹시 얼굴이 떠 오르는 분들이 있을까요? 참 어렵고 힘든 삶을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지체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얼마 전에 간난 아이도 한 명 있습니다. 그 형제를 생각하면,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 지 상상도 못합니다. 이렇게 유독 인생의 짐이 무거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다윗은 친구에게 배반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잡으로 쫒아오자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냥 사는 것이 힘듭니다. 숨쉬기 조차 힘이 듭니다. 삶의 무게 때문입니다.
여기에 환난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한다면, 그로 인해 느껴지는 인생의 무게는 말로 할 수 무겁습니다. 무겁디 무거운 멍에를 끌고 밭을 가는 소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힘이 듭니다. 지진이 나서 건물이 무너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수고는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마치 무거운 돌을 어깨에 올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들 모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정체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은, 우리 모두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인생을 살펴보면 온통 수고와 무거운 짐들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부모라면 다 아실 겁니다. 한 생명을 잉태하고 키운다는 것이,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수고롭고 무거운 짐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날들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허리가 휘기도 하고, 무릎이 아파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 된 날들을 보내면서 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으로 복된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좋아서, 쉽게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멘!’입니다. “주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주님이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주님이 초대하십니다. 고통과 죄악 뿐인 우리 인생이지만,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사는 우리를, 주님이 ‘내게로 오라’라고 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이 초대장이 여러분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렇지만 우리 안에 작은 질문이 연기처럼 스물스물 올라옵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정말 쉼이 있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신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주님이 주신 쉼이 있으신가요?
앞서 말씀드린 한 형제의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 형제는 지체 장애가 있는 한 아이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그 분의 삶을 지켜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50킬로그램은 되어 보이는 바위를 들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니 삶의 무게는 그것보다 더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수고하는 일도 힘든데,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든데, 또 하나 거대한 짐처럼 느껴지는 지체 장애인을 키워야 하는 일을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한 그 분들에게 주님이 주신 쉼이 있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 분의 간증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이 주신 쉼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를, 인생의 짐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대신 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긴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를 보내주셨다고, 천사 같은 아이를 보내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에게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이 이 가정에 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이 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의 짐 같은 시간들이, 인생의 선물 같은 시간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가정에 힘든 일이 또 생겼습니다. 지체 장애 아이 때문에 이사를 했는데,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세 아이의 아빠로, 가장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가 다시 무겁게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오늘 본문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가 되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형제가 아는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 것이 그것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직장을 알아봐야 하고 인터뷰를 통과해야 합니다. 삶의 무게가 그를 누를 때,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간 형제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어떤 일이 생겼으면 하시나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그 분의 삶의 문제에서도 가벼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대해 봅니다.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다시 웃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주님의 약속처럼 주님 앞에 엎드린 그 분 마음에 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시게 되었다면, 여러분도 오늘 본문을 붙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이 수고롭게 무거운 것 뿐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쉼을 주실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을 다시 읽고 묵상하면서 새롭게 다가온 부분이 29절입니다. 우리에게 쉼을 약속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셨으면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강하고 힘이 세니’ 또는 ‘..나는 전지 전능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니’ 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논리대로 라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힘들고 어렵니? 내가 힘이 되어줄께!’라고 하실 것 같은데,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 주신다고 하시지 않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말씀으로 대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수 많은 단어 중에, 예수님이 선택한 자기 정체성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멍에 대신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하신 부분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삶의 멍에, 죄의 멍에보다, 예수님의 멍에가 더 가볍다고 하십니다.
‘주님, 정말로 주님의 멍에가 가볍나요?’ 이렇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를 조금만 살펴봐도 예수님의 멍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세상 죄를 다 지고 가는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약속처럼 쉼이 생기기 보다는 우리 인생의 멍에와 더불어 더욱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갔더니 여러분의 삶에 쉼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알 수도 없는 짐들이 여러분의 어깨를 짓누르고 계신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쉼이 없고, 인생의 피로도만 더 높게 쌓이고 있으시는 않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주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의 마음에 쉼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우리는 평생 동안 예수님에 대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배우라고 하신 것은 ‘콕 집어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는 비결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와 겸손’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유와 겸손은 우리가 결심한다고 그러헤 되지 않습니다. 나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를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게 우리의 고민이지요.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신 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그 분의 기도 요청은, 자기에게 인내심이 있기를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 온유해 지기를, 겸손해 지기를 기도 부탁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인내심이 없고 성격이 불 같은 성격이라 그런 기도를 부탁드린 것일 것입니다. 그러자 기도 부탁을 받은 목사님이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이 형제에게 환란을 주시옵소서’
기도 요청을 했던 형제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말렸습니다. ‘목사님, 제가 인내를 할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했지, 환란을 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 부탁 드린 것은 아닌데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성경 구절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게 하나니.. (롬 5:4)’ 그러니까, 목사님이 로마서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맞는 것 같은데, 환란을 통해 인내가 생기는 것은 좀 꺼름찍 하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맞습니다. 인내는 환란이 있을 때, 그것을 견뎌내는 사람에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온유와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온유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꽃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시 머리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신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그러니까, 주님의 멍에를 메고 가신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 겸손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지고 걸어가신 길은 겸손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자신을 모욕하고 침을 뱉는 이들을 참으시고,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분노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서 우리는 온유를 보게 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는 그 분에게,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삶의 무게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길, 가시밭길을 걸게 될 대, 분노와 증오를 배우지 말고,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실제로 어떤 이는 인생의 수고와 인생의 짐들이 원망와 저주와 분노로 표출합니다. 그들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웁니다.
누군가 나를 욕하고 침을 뱉어도, 치욕스럽고 너무나도 무거운 짐 같이 느껴지는 일을 당하셨나요? 불평과 원망과 저주를 배우지 마시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시간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때에 우리의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분노에 가득 찬 마음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가득찬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상학 목사의 ‘비움’이라는 책에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 무엇일까요? 이 분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방어하느라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은혜를 걷어차 버린다고 진단합니다. 그렇지만, 억울함을 견디면,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고, 우리 인생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여준 한 사람이 야구 선수 ‘제키 로빈슨 (Jackie Robinson)’입니다. 이 분은 1940년대에 미국에서 야구 선수로 대단한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제키 로빈슨이 야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는 ‘예수를 닮고자 하는 마음과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1940년대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무엇보다 흑인이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키 로빈슨의 재능을 알아본 구단주(당시 브루클린 다저스, 현 LA 다저스) 브랜치 리키가 그를 불러서 거룩한 실험을 한 번 해 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 제안은 ‘흑인도 야구를 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당당하게 대접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보여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빈슨은 크리스챤이었지만, 평소에 백인에게서 받은 스트레스와 마음에 울분이 쌓여 있었습니다. 거기에 제키 로빈슨은 급하고 거친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하고 주먹다짐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구단주 리키는 제키 로빈슨에게 거룩한 제안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라는 책을 한 권 건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처럼 야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예상하신 것처럼 제키 로빈슨이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백인 관중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제키 로빈슨이 안타나 홈런을 치면 박수 대신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반면 제키가 실수라고 하면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그의 동료들도 ‘짐승과 다를 바 없는 흑인이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냐’면서 홀대하고 따 돌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야구를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순간이 그에게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구단주 리키는 제키 로빈슨에게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 맞대응하지 말 것을 요청했습니다. 제키 로빈슨도 흔들림 없이 야구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 시간들을 통해 제키 로빈슨은 인내를 배웠습니다. 나아가 온유함과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키 로빈슨이 프로야구 선수 활동을 하는 동안 팀을 6번이나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내셔널릴그 최고의 신인 상을 받았습니다. MVP로 선정되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올스타게임과 월드시리즈에 6번씩 진출했습니다. 1962년도에는 흑인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야구의 명예 전당에 기록되는 신화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종차별과 편견을 극복한 용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용기와 열정’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온유와 겸손’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키 로빈슨이 예수께 제대로 배운 것입니다.
제키 로빈슨 주변에서 일어난 일은 온갖 환란과 멸시와 모욕이었지만, 멍에였지만, 그 멍에 대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 시간을 견디었더니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힘드세요?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누군가 있으신가요? 복수하고 싶으세요? 화라는 폭탄을 던지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쉼을 허락하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가지고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통해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8:30)’.
그런데 앞서 예수님의 멍에가 무겁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세상 죄를 다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쉽다,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멍에는 특수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멍에의 무게가 주님께 다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기에 주님의 멍에가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어미 소와 송아지가 멍에를 메면, 대부분 짐의 무게를 어미 소가 감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다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그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제키 로빈슨처럼 다윗도 하나님께 자기의 짐을 맡긴 사람입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자신을 배반했을 때 느낀 그 절망감은 그가 짊어 져야 했던 무거운 짐입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인생을 살면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 몸에서는 땀이 흐릅니다. 거대한 바위가 어깨 위에 얹어진 것처럼 형벌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그 때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유와 겸손을 배웠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인생의 어려운 순간들이 있을 때 오늘 본문이 기억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키 로빈슨처럼, 다윗처럼, 믿음의 선조처럼, 그 누구처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오히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로다 (시편 55: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