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부모와 자녀처럼 천륜도 있고,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며 가며 스치듯이 만나는 사람도 있고,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만남에는 위로가 있으며, 어떤 만남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만남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런 만남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간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예배에는, 저를 만나러, 시애틀에서 멤피스까지 운전해서 오신 분이 계십니다. 다른 곳으로 가시는 도중에 잠시 들리셨는데요. 저와 무슨 관계냐 하면, 선생과 학생 관계입니다. 저는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아일린(Eileen)님은 제게 한글을 배우는 학생입니다. 거의 매주 온라인 상에서 만나서 한글을 공부했는데요. 이번 달로 4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만날 수 있는 관계라면, 보통 사이는 아닌 듯 합니다.
이 분을 만나게 되었던 것은, 직장을 잃고 새롭게 시작했던 온라인 수업을 통해서 입니다. 처음 이 분을 만났던 날이 기억이 나는데요. 처음 만난 저에게 자신의 허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이유를 자세히 말씀해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저도 이 분을 위해 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저희들의 만남은 이 분의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만나게 된 사람이 저라는 것이, 제 학생의 간증입니다. 제가 좋은 선생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ㅎㅎ. 그리고 이 분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제가 자신을 격려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한글을 공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제가 많은 격려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니, 하나님께서 이 분을 통해 저를 많이 위로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까마귀를 보내 먹이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분을 통해 저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제 식사를 하면서 이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또한 오늘 이렇게 함께 예배 드릴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동일한 주를 섬기는 믿음의 동지를 주신 하나님께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어제, 제가 목사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래셨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도 나중에 저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셔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해 보게 되었어요. 성경 이야기가 만남에 대한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만남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묵상해 보니까 다른 느낌이 들었어요.
나면서 앉은뱅이로 살던 사람이 생각해 봤습니다. 이 사람에게 소중한 만남이라고 하면,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의 만남을 이야기할 것 같아요. 만약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 너무 끔찍했을 것 같아요. 성전 앞에서 구걸하면서 살았던,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준 고마운 사람이 있었기에 그의 삶이 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위로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도 다른 사람들의 손을 일으켜 세워주는 삶을 살았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도,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준 고마운 분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분들을 통해 저를 위로해 주셨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 만남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저도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기도를 해 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저에게, 또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2.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초대 교회의 모습은 현대 교회에게 동경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소리엘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찬양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우리 공동체 안에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이 사도행전 말씀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교회 답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공동체 회복하기가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찬양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숨쉬는 교회,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믿음의 기도가 쌓이는 교회,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 성도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아름다움 교회, 주님의 마음 닮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 되신 주님 전하는 교회, 사랑의 불꽃이 활짝 피어나 날마다 사랑에 빠지는 교회,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이런 교회는, 만남을 통해, 그리고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지난 주에 살펴봤습니다.
저는 이 가사에,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풍성한 교회,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만난 이야기들이 풍성한 교회, 그런 교회 되게 하소서 라는 가사를 찬양에 추가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초대 교회가 현대 교회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곳에 있던 신실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 중 한 명이 ‘바나바’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의 출신과 원래 이름를 소개하고, 그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익숙한 바나바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이고 레위족 사람이고 성경은 말하는데요. 구브로는 지중해 동북부에 있는 큰 섬인데요. 나중에 보면,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형제들로부터 안수를 받은 후에, 자기 고향인 구르보에서 목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레위족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가 성전 관리와 제사 드리는 일과 무엇보다도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때 당시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있던 시기여서, 성전에서 레위인들의 역할이 미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회에 했던 일은 자기의 소유인 밭을 팔아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과 연관해서 교회에서의 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소개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바나바는 번역하면, “권위자” 다른 번역본에는 “위로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나바가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바나바의 어떤 모습이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오늘 여러분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위로”라는 사전적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봤습니다. 위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위로라는 설명을 읽고 나니까, 현대인들이 위로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생각해 보면,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도 위로 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가 하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시편 23편을 좋아하는데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 시편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조금 있다가 함께 찬양을 부르게 될 찬양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선하신 목자 날 사랑하는 분, 주 인도하는 곳 따라 가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는, “나를 사랑해 주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최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었습니다.
선하신 목자,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괴로움을 덜어 주시겠다 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어디로 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 놀러 가지? 내년 수련회는 어디로 가지?” 와 같은 행복한 고민도 있지만, 삶의 방향을 담고 있는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은 무겁기만 합니다. 특히 어떤 목표 지점을 정하고, 온 힘을 다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절망에 빠질 때가 있는데요. 그것을 목표 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 사라져 버릴 때 입니다. 그리고 하는 질문이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입니다. 저를 봐도 10대와 20대의 많은 시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방황하다가 생긴 고통이었습니다. 30대, 40대, 50대. 이렇게 나이가 들수록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의 무게는 더욱 커집니다. 그래서 나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만 줘도 위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고민에 빠지신 분이 혹시 있다면, 이 찬양이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가사대로 라면, 우리가 가는 곳은 나를 사랑하는 그 분이 인도해 주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선하신 주님이,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 만으로도 큰 위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나 듣기 위하여 주 인도하는 곳 가려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내 선하신 목자 날 인도해,
험한 산과 골짜기로 내가 다닐찌라도 내 선하신 목자 날 인도해’
배고픈 양에게 목자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에게 지도를 꺼내 보이면서 이렇게 저렇게 가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양에게 풀을 주지 않으면서, 배고프면 풀 먹으면 되지 라고 말로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목 마른 양에게 물도 주지 않으면서 목 마르면 물을 먹으라고 말로만 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선하신 목자 되신 주님이 어떻게 하신다고 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의 빵과 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배워야 하고 또한 우리가 살아야 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로 살았던 사람에게는 커다란 삶의 무게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은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교회는, 또한 현대 교인들은 다른 사람 위로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꾸만 배고픈 양에게 ‘풀 먹지 왜 굶고 그래’ 라고 말로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목 마른 사람에게 ‘물 먹으면 되지, 그 쉬운 걸 안 하냐’고 말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큰 사고를 당했을 때 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은 따뜻한 위로의 말과 기도 뿐입니다. 어떤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 나아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로 불리워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초대 교인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계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형제, 자매에게 바나바는 그들의 물과 빵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바나바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어려운 교우들을 도왔습니다. 말로만 평안을 외치지 않았고, 삶으로 행동으로 사람들을 도와 줌으로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바나바 뿐 아니라, 무명의 수 많은 사람들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던 교회가 초대 교회였습니다.
셀 수도 없는 바나바들이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사도 바울이 되도록 도와준 사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예수를 전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던 것인데요.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사울이 변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청년 사울의 말을 믿어주고, 그를 다른 사도들에게 소개해 줬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목회를 했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아니였다면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데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뒤 따랐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사도 바울의 위로가 된 것은, 바울이 거듭난 후에 그를 찾아가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들어 주었고, 그의 말을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면,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바울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바나바의 위로 방식은 마가라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 여행을 가려다가 크게 싸운 일이 있는데, 마가라는 청년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갈 수 없다고 말했고, 바나바는 같이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심히 다투고 갈라서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행 15:37-39).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 바울이 마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마가를 믿어준 한 사람, 바나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준 한 사람’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의 일부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 곁에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 삶에 공감해 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한 사람. 당신에게도 그 한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몇 사람을 예로 듭니다.
책에서 박상미가 만난 사람들은 역사적 위인이나 거창한 롤모델을 그 ‘한 사람’으로 꼽지 않는다. 때로는 부모가, 때로는 배우자가, 또는 선생님이나 친구가 지금의 자신을 가능케 했다고 말한다. 배우 김혜자는 자신을 지지해준 남편이 있었기에 잠자고 있던 수만 개의 표정을 발굴해서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있었다. 국문학자 박동규 교수에겐 눈물겨운 사랑으로 키우며 학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준 부모님이 계셨다. 독보적인 연출가 표재순 감독을 만든 건, 생계 앞에서 꿈을 포기하려는 남편에게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쳐준 아내의 힘이었다. 신경림 시인에겐 헌신적인 어머니와,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영혼을 소통할 수 있는 ‘전우익’이라는 벗이 있었다.
초대 교회에는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바나바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소유인 밭을 팔아서 그들을 실질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들의 짐을 함께 들어준 것인데, 이것이 바나바가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면, 깊어지려면 우리의 손을 더럽혀야 한다고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바나바는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을 직접 찾아가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또한 그의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어주고, 그가 하는 말이 진실하다며, 다른 사람에게 그를 소개해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가져오는 고통과 두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믿어준 한 사람, 바로 바나바 입니다. 바울에게 자신을 믿어준 바나바가 큰 위로가 되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도 바나바를 닮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를 위로하는 방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는 철 없던 마가를 믿어줌으로, 다른 사람에게 믿음직한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위로의 아들.
다른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은 안 믿어주지만, 내 삶을 공감해 주고, 나를 믿어준 한 사람.
어리숙한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준 한 사람.
그 사람이 초대교회에 있었다는 것이 현대 교회의 부러움입니다.
우리도 그런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건물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나바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이런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바나바를 통해 흘러 넘쳤기 때문에 그가 ‘위로의 아들’이 될 수 있었음을 또한 우리가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한 사람이 있나요? 나를 믿어준 한 사람,
그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우리도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누군가에게 위로의 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