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지난 주에 여러번 듣게 된 노래가 있습니다. 윤복희 님의 노래 ‘여러분’입니다. 이 곡은 지금은 윤복희 권사님이라고 하는데, 이 분이 1979년, 제가 아홉살 때, 서울에서 열린 ‘국제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신 곡입니다. ‘여러분’이라는 노래는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커한 명곡이기도 한데요. 색깔이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누가 불러도 감동이 있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 받았다 너무 좋다는 반응을 보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라는 곡이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원래 곡은 1절은 ‘한국어’, 2절은 ‘영어’로 되어 있는데요. 저는 그 동안 1절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째든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친구가 될 게//네가 만약 기쁠 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나는 너의 친구야/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나의 너의 기쁨이야/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만약 내가 외로울 땐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여 러 분..
이 노래의 2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When you walk through the cloudy days (앞이 안 보이고 캄캄하냐?)
He said, I’ll be the one to be your cane(그가 말했지, 내가 너의 지팡이가 되어 줄께)
When you need someone to share your love (네가 사랑이 필요할 때)
He said, I’ll be the one to be your love (그가 말했지, 내가 바로 너의 사랑이 되어줄께)
So smile and look at me, And I will tell you what (그러니까 웃고 나를 봐, 내가 네게 말해줄 게 있어)
Everybody is passing through this way (누구나 모두 다 이 길을 걸어가고 있어)
So have faith, and be tall, you can’t stop now (그러니까 나를 믿고 어깨를 펴. 여기서 너는 멈출 수 없어)
Now is the start, this is the way (지금이 시작이고, 이것이 길이야)
And only way( 그리고 이 길 하나 뿐이야)
We’ve got to march and go to a high up there (우리 함께 이 험하고 아픈 세상을 같이 걸어가자)
He is the start and he is the way and only way (그가 시작이고 길이고 진리이니까)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여러분 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내가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아들을 누구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 목 박혀 죽게 했는줄 아니?” 바로 너야.
이것이 ‘여러분’이라는 노래에 숨겨진 진짜 의미입니다.
윤복희 선생님은 ‘여러분’이라는 노래로 주님의 복음을 들려준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아멘’으로 화답한 것입니다. 너무 좋다! 너무 위로가 된다! 라고 말입니다.
근데 노래를 들으면서 자꾸만 ‘아가’서가 생각냈습니다. 물론 요즘 솔로몬이 지은 아가서를 묵상하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한 것일 겁니다. 어째든 여러분에 나오는 말들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향해서 해 주던 말들과 비슷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누누이 비둘기 같구나”라고 말입니다.
솔로몬의 이 말들은 주님이 신부인 교회에서, 교회인 성도에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주님의 이 고백이 들려지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나의 영원한 친구야, 너는 나의 기쁨이야, 너는 나의 노래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그러면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어떻게 ‘여러분’이라는 곡이 만들어졌느냐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인데요.
윤복희 선생님이 하루는, 공연이 너무 많아서 과로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 마침 하용조 목사님이라고, 온누리 교회를 담임하셨던 분도, 치료 차 옆 병동에 입원해 계셨다고 합니다. 윤복희 님은 하 목사님에게 성경을 배우셨다고 하는데요. 어째든 하 목사님이 윤복희 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다고 해요. 평신도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한다는게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어째든 윤복희 선생님은 목사님을 위해 기도를 해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자기 귀에 영어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정리해서 만든 노래가 ‘여러분’이라는 겁니다. 이 일이 1978년 일인데요. 1979년도에 서울 국제가요제가 있다고 갑자기 초청을 받아서, 한국어로 1절을 쓰고 부른 노래가 ‘여러분’이라고 합니다.
윤복희 선생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여러분” 이라는 노래가 윤복희 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엠마오로 가는 예수님의 두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이기도 하고, 어쩌면 주님이 이들에게 이미 들려주신 노래가 ‘여러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 하면, 지금 이 부부들이 처해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2.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1킬리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엠마로로 가고 있는 예수님의 두 제자는 글로바와 그의 아내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부가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고 따랐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엠마오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그들에게 이 길은 슬픈 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사흘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소망이 되셨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글로바의 아내는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있었을 상실감이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예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슬픔에 잠긴 배우자를 위로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앞이 보이지 않고 깜깜한 길입니다. 소망도 잃어버리고, 절망감으로만 충만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들의 있엇던 절망감은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부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는 절망감은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누우셨던 그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가지 않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줄 알고 절망하면서 산다는 것은 이처럼 불행한 것입니다. 진짜 뉴스를 듣고도, 그들은 자신의 경험 세상에 갇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으니 하나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없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길동무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글로바와 그의 아내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이것이 주님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이 부부에게 주님은 또한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실 예수님, 오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
주님이 성경을 비밀을 풀어주시자, 제자들의 마음에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윤복희 선생님의 마음을 뜨겁게 한 것도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주님의 말씀으로 뜨겁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심장이 뛰어보신 경험이 없다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슬픔에 빠진 두 제자의 친구가 되어 주셔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는 주님이 여러분의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친구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뜨거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 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이 보일 때 제 심장도 뛰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 그랬다구요? 왕년에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길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믿음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인내하시고, 우리를 진리로 가르쳐 주시며, 살 소망을 주시고 믿음이 되어주시는 주님을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두 제자의 대화는 오랫동안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글로바와 그의 아내가 친구되신 예수님을 초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으니 우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지요?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웠던 그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던 겁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귀한 만남은 지속하고 싶습니다. 길을 가다 만난 낯선 사람을, 두 부부는 용감하게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 일은 이 부부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친 랍비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그들의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어요. 바로 두 제자들의 눈이 밝아진 시점입니다.
그들의 눈은 빈 무덤의 이야기를 들거나, 천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을 때도 눈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성경 공부를 하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음식을 나눌 때’에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렸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과 우리가 사랑의 나눔이 있을 때, 우리의 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과 저녁 식사를 하는게 중요하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 한끼 어떠신가요? 신나세요? 아니면 부담되시나요?
그 분은 우리에게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나는 너의 기쁨이야’ ‘나는 너의 노래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까 잘 생각해서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어떠신가요? “
‘데이비드 그레고리’ 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의 제목은 이래요. ‘예수와 함께 한 저녁 식사’ 오늘 예수와 단 둘이 마주 앉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4.
성경에는 읽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와 식사를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서 그들과 식사하셨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셨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식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요?!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님의 책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에서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지가 강조되고 있는데요.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은 우리가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데 아주 중요하며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시켜준다. 거의 신비에 가까운 방식으로 음식과 인간 관계는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정성과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희생과 기쁨’을 나누는 자리인 것이다. .. 그러므로 주인이 음식을 준비했다면 맛있게 먹는 것은 손님된 도리이다.
주님과의 저녁 식사 어떠세요? 메뉴 걱정에 잠 못 이루실 것 같으시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평소에 자주 드시는 빵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아니면 생선 요리도 좋아하시지요.
주님은 빵을 들고 축사하시고,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는, 진작 본인은 별로 드시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얼마나 기뻐하실지 아셨을 텐데, 그 틈도 주시지 않고 사라져 버리신 것입니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님을 못 알아볼 때는 친구가 되셔서, 또는 선생처럼 가르쳐 주시고, 위로하시며 함께 길을 가시던 분이, 주님을 알아보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주님은 우리가 힘들 때 사라지셨다가, 우리가 아무런 일도 없고 평안할 때만 나타나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더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우리의 선생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을 알아볼 때까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소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 뿐이라고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쁜 일정을 보내셨는데, 그 중에서도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캄캄할 때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그런 주님을 만났을까요?
마태복음 25장에 예수께서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임금의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는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4:35,36).
그러자 의인들이 언제 그렇게 했냐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한 작은 일에도 기뻐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것, 배 고픈 사람에게 햄버거 하나 사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이것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처럼 느껴졌던 낯선 그 사람에게 하신 일이라면, 그것이 우리가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하나로 나타나실 수 있어요. 너무 힘들어서 남 도와줄 힘이 없을 때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 작은 일을 주님이 기뻐하세요. 주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도 주목하시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볼 때 작은 일을 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에게 칭찬하세요.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입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람일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주님이셨다 라고 말하는 엠마오의 두 제자의 이야기가 들리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 같아요. 주님을 대하듯이, 우리가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눈이 밝아졌을 때, 우리가 한 일을 보면서 후회하지 않게 말입니다.
5.
주님을 만난 두 제자가 얼마나 기뻤을까 상상해 봤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럴 여유를 주시지 않으세요. 그리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하셨을지 오랫동안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33절을 보면서 답을 얻었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새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엠마오의 두 제자가 눈이 열리고 나서 한 일은 ‘곧바로 일어난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들이 주님의 뜻을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는 길이 잘못된 길임을 깨닫자, 곧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일어나 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눈이 열리고 주님을 보게 된다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안이 열리고 주님을 알게 된 후에, 그 주님을 만나 기쁨에 취해서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자기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라는 주님의 뜻을 그들이 알아치린 것입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주님이 보이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주님이 보이면, 우리에게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러 주님이 보이면, 주님이 뜻이 보이게 되고 세상을 향한 담대함이 생기게 됩니다.
죽음 이기신 어린양! 이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의 친구가 되시며, 나의 노래가 되시며, 나의 기쁨이 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열려서, 주님이 알게 되심으로, 주님의 뜻이 주님의 보여주시는 길이 분명해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