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일명 ‘인천 장발장’ 사건입니다. 2019년 12월 10일, 인천 중구에 있는 한 마트에서 일어났던 일인데요. 무인 카메라에 어떤 남자와 어린 아이가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화면 속 어른과 아이가 훔친 물건은 사과 6개와 우유 2팩이었다고 합니다. 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남자는, 연신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구구절절 자신이 왜 훔쳐야 했는지를 말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말한 내용들은 이런 것입니다. “당뇨와 갑상선 질환에 걸려, 마땅한 수입이 없다. 임대 아파트에서 모친과 두 아들을 부양하는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이다. 무엇보다 배가 고파서 훔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합니다. 이 남자의 사연을 들은 마트 사장님은, 찾아온 경찰에게 이 남자의 처벌을 원치 않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이 가정에 쌀과 생활용품을 지원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뿐 만이 아닙니다. 이 남자를 잡으러 왔던 경찰은, 어른 남자와 아이가 끼니를 걸렀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입니다. 식당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한 사람이 나가옵니다. 그리고는 흰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 놓고 황급히 식당을 빠져 나갑니다. 봉투 속에는20만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수소문을 했지만, 이 남자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확인된 바로는 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남자의 사연을 옆에서 들었던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직은 살만 하구나 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대로 하면, 도둑질을 한 남자는 처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옳은 일입니다. 형평에도 맞아 보입니다. 그러나 왠 일인지 아무도 그에게 죄를 묻지 않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다. 분명히 일어난 일인데 없던 일처럼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도둑 잡으러 온 경찰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경찰이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합니다.
이 일이 화제가 되니까, 한 언론에서 마트의 사장님을 인터뷰했습니다. 물건을 훔치려고 한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인의 대답합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면 누구든 나와 같은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덧붙여, 마트 사장님의 말이 ‘자기도 20년 전에 사업 실패로 가족들 끼니 걱정할 만큼 어려웠는데, 이 남자와 아이를 보면서 그 때 생각이 났다는 겁니다. 우리의 고난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옳은 일을 하기보다는 친절을 베푸는 쪽을 택했습니다. 거기에 먹을 것도 넉넉히 더 주었습니다. 이 마트의 사장님 딸은 결혼 축의금의 일부를,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사과 6개, 우유 2팩을 훔치다 잡혔는데, 도둑이라는 꼬리표 대신 용서 받음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도둑을 용서해 준 것이 화제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후원도 이어졌습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복 받은 사람이 되었네요. 죄인이 은혜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죄를 묻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선물이 차고 넘쳤습니다. 이렇게 말이 안되는 상황을 우리의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입니다!’
은혜는 죄인을 복 받는 사람으로 바꿉니다. 은혜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은혜는 소망을 불어 넣어줍니다. 은혜는 생기를 불어 줍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의 삶은 변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은혜가 넘치는 세상은 따뜻합니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우리 마음은 따뜻합니다. 은혜가 세상을 바꿉니다. ‘인천 장발장 사건’ 이야기가, 성탄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 읽다가, 오늘 본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서 ‘인천 장발장 사건’과 유사한 점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인천 장발장 사건과는 비교도 안되는 더 엄청난 일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청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18,19).
이 구절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나는 이야기라는 깨달음이 있었는데요.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저의 깨달음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이 말이 무슨 뜻일지 궁금했습니다. 공동 번역을 찾아봤더니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다’는 말은 ‘그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삶이 어떠했을지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렇게 올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청청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이지요. 왜냐하면 신부가 부정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순결하지 않습니다. 신부가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약속도 어긴 것입니다. 요셉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수치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의롭게 사는 요셉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요셉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요셉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분노가 하늘을 찌를 수 있는 상황입니다. 황당하면서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져서 그렇습니다. 의로운 요셉에게 닥쳐온 엄청난 시련인 것입니다. 나름 의롭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가난해도 자존심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고민이 많이 되었을 겁니다. 이런 일은 남의 일인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법대로 해야 하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을까?” 온갖 생각이 그를 집어 삼켰을 겁니다. 법대로 하면, 약혼자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약속을 어긴 사람. 자신에게 수치심을 준 사람. 나를 모욕하고 모독한 사람에게 내려져야 하는 마땅한 벌로 여길 수 있습니다.
사과 6개와 우유 2팩을 훔친 사람의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약혼자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약혼자가 간음을 했다고 하면 함께 분노할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그렇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니까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고민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법대로 해야 하는지, 그렇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겁니다. 법대로 해야 할까요? 아니면 모르는 척 지나가야 할까요?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요셉은 결정합니다. 옮음보다 친절을 베풀 생각을 합니다. 법대로 해야 하지만, 친절을 베풀기도 말입니다. 마리아와 그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살릴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내린 결정을 보면서,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시간이 지나면 마리아는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그 일이 요셉의 삶에 미칠 파장은 엄청난 것이 될 것입니다. 요셉을 평생 따라다니는 오점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옮음을 쫒지 않고 친절을 베풀 생각을 했습니다.
옳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욱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은 친절을 베푸는 일입니다. 친절을 베푸는 일은 비겁해서 약해져서 하는 결정이 아닙니다. 큰 용기를 내면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인천 장발장 사건에서 보았던 것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새로운 생명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은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도약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베풀어 보세요. 화가 날 때 크게 숨을 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살리는 것인지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크게 숨을 쉬고 친절을 베푸는 방향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로운 결정입니다. 은혜는 옮음이 아니라 친절을 선택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3.
큰 용기를 내고 있는 요셉은 꿈을 꿉니다. 머리 아픈 일이 있을 때는 자는 게 최고예요.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떤 일은 그냥 해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오늘 본문처럼,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적용해 봐요. 힘든 일이 있으면 주무세요. 잠깐이라도. 주님께 우리의 염려를 맡겨드리는 방법이에요. ㅎㅎ
물론 요셉이 자려고 잔 것은 아닐 겁니다. 너무 힘들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셉은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깜박 잠에 든 것 같아요. 그런 그에게 주의 사자가 꿈에서 그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옳음을 포기했고 친절을 베풀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간음한 약혼자를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용서는 못하더라도, 약혼자와 다른 생명을 살리려고 결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알게 됩니다. 자신의 옳음이 틀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셉이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한 것을 말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간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일은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말해줍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옳습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이와 연령과 성별과 국적과 인종에 따라 옳은 것의 기준이 다양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옳은 일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옳음보다 친절을 베푸는 쪽을 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은혜를 택하길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보시길 바랍니다. 특히 성탄절에는 말이지요.
요셉은 마리아에게 큰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며, 요셉의 오해도 풀어줍니다. 그리고 나아가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 하라는 말씀이지요. 요셉 입장에서는 용기를 내고 있는데, 더 큰 용기를 내라는 주문을 한 것입니다. 또한 주의 천사의 말은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낙담할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죽을 일이 아니다. 이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일은 부정한 일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맨날 이 모양이라고 하지 마라.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뜻입니다.
우리 삶에는 분명 머리 아픈 일이었습니다. 수치스럽고 우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법대로 살았던 요셉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입니다. 은혜를 베풀기 시작한 때 부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이 베푼 그 은혜 위에, 또 다른 은혜를 더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성탄절의 메시지’는 ‘은총’입니다. ‘은혜’입니다.
4.
요셉이 베푼 은혜도 크지만,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옳은 일이지요. 성경에는 물의 심판과 불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사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심판에서 면제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롯의 가족들입니다. 왜 그들은 심판을 받지 않았을까요?
성경에서 노아는 이렇게 표현되는 사람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창 6:9,10).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라는 표현은 그가 구원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실제로 그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죄를 범했습니다. 그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노아가 구원을 받았냐 하면,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여기서 우리는 ‘그러나’라는 단어에 주의 해야 합니다. 알리스터 맥스래스(Alister McGrath)는 ‘그러나’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성경은 종종 이 ‘그러나’라는 말을 극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사용하곤 한다. 이 럴때 이 말은 어쩌면 꿈이 아닌가 싶은 새 장면이 펼쳐지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노아는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그렇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한 가지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이 조종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 마음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우리를 찾아와야 합니다. 예수가 은혜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은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우리를 죄에서 건지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법대로 아닌 친절을 베푸시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 안에 담겨져 있는 큰 은혜입니다.
5.
성탄절은 은혜라는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여러분과 제게 그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죄가 있으나 심판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여기에 온갖 좋은 것을 넘치도록 선물 해 주십니다. 은혜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찬양이 있지요.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 없는 주의 은혜! “
이렇게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 날이 성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이렇게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모두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너는 내 딸이다. 너는 아들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공중나는 새를 보세요. 들판의 피는 꽃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이 우리도 입히시고 먹이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안으로부터 하나님의 안전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후회 뿐인 인생으로부터 더 나은 인생으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명의 비상으로 바꾸어줍니다’
요셉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불안에서 안전으로, 수치심에서 영광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를 날아가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에게, 주님은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은혜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변화할 것을 명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의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5).
하나님의 은혜는 한량이 없습니다. 무너진 것이 세워집니다. 고물이 보물로 바뀝니다. 죄책감이 자유로 바뀝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뀝니다. 사과 6개와 우유 2팩을 훔친 사람에게 임한 은혜가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베푼 은혜가 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는 어떨까요? 그 은혜가 끝이 없습니다.
6.
결론을 맺습니다. 성탄절은 옳음이 아니라 친절을 베푸는 날입니다.
요셉은 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절을 베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일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의 용기로,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마리아는 생명을 보장 받았습니다.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도 태어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기 원합니다. 옳음보다는 친절을 베푸세요. 이것이 성탄절의 정신입니다. 인천 장발장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되길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딤 2:11)’.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일터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 분은 죄인된 우리를 은혜로운 삶으로 적극 인도하십니다. 은혜를 받아 은혜를 베푸는 삶으로, 용서를 받아 용서를 베푸는 삶으로, 좌절의 한숨이 깊은 안도의 한숨으로, 자주 넘어지지만 좌절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은혜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