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사도 베드로가 만났던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룻다에 살았던 애니아라는 사람과, 욥바에 살았던 다비다라는 여제자인데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감명 깊었던 부분이 있었는데요. 중풍병자 애니아가 치유받는 장면도 아니고요.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나는 장면도 아닙니다. 제가 감명 깊었던 부분은 39절입니다. 죽은 다비다에게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이 베드로에 곁에 서서 울면서, 다비다가 그들을 위해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울컥 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본문을 여러 번, 여러 날 동안 반복해서 읽었는데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는 겁니다. 생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과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움직인 것인데요. 갑자기 집 사람 생각이 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정신차리세요. 이 양반아~ 자기 옆에 있는 사람한테 신경을 더 써야지.. 욥바에 사는 과부들은 무슨.. 제발 내게 신경 써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ㅎㅎ
그런 상상이 되니까. 다시 말씀을 보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다시 말씀을 읽어도 같았습니다. 여전히 과부들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여전히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눈에 들어 왔습니다. 룻다에 사는 애니아, 욥바의 다비다 그리고 과부들.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 물론 여전히 과부에 마음이 가더라구요.
“하나님이 무슨 교훈을 주시려나 보다’ 이런 기대를 해 봤습니다.
2.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어요. 바로 ‘고난’입니다. 애니아, 다비다, 과부들, 거기에 사도 베드로의 삶에서 발견되는 것은 ‘여러 모양의 고난’입니다. 지난 두 주 동안 나누었던 사도 바울의 고난과는 또 다른 고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받았던 고난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았던 고난’이었지요. 그가 받는 고난은 사도 바울의 삶에서 최고의 가치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되면, 고난을 받아도 고난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아가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기도 하고, 고난이 축복이다. 고난이 선물이다 이렇게 인식하기도 합니다.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았던 고난이었음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주님 안에서 고난이 새롭게 해석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바로 “고난은 축복이고 고난은 선물이다”는 말입니다. 자꾸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말을 강조점을 두는 이유는,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신 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에게 고난은 고난일 뿐입니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 애니아와 과부들과 같은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는 것이 힘들 뿐입니다. 고통이고 지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 앞에서 ‘고난이 축복이다’ ‘고난이 선물이다’ 라고 말하면, 욕 먹기 딱~ 좋습니다. ‘말이야 막걸리야’ 이런 핀잔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또한 “그렇게 고난이 선물이고 축복이라면, 너도 한 번 나처럼 되어 보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면, 앞에서 언급한 중풍병자와 과부들에게 고난은 무거운 짐일 뿐이라는 겁니다. 해결책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삶이 전쟁터입니다. 너무 끔찍하다는 말입니다. 좌절과 공포로 가득한 삶인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상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삶.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삶을 묵상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는데요. “이분들 마음이 지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배터리라면 완전 방전이 이루어진 상태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 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마음 충전입니다.
3.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가 충전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 회복 능력이라고 부르는데요. 예를 들어, 등산하고 나면 피곤하지만, 잠자고 일어나면 그 다음 날 다시 멀쩡해 집니다. 자면서 회복이 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운동을 심하게 해서 탈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쉬면, 다시 회복이 됩니다. 우리 몸에 있는 자가 회복 능력, 자가 충전 능력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탈진이 되거나 지칠 수 있지만, 쉬거나 어떤 계기가 있으면 다시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는 너무 힘들었지만, 오늘을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직은 마음 배터리가 생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배터리가 완전 방전이 되면 충전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배터리처럼 방전되면, 스스로 충전이 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생각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잘 할 수 있어 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무기력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하면,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삿대질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자꾸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소리를 치실 겁니다. 마음 배터리가 고장이 나면, 고난은 그저 고난일 뿐입니다. 나아가 고난을 통해 얻는 교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분들에게 마음 충전이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음이 지친 분들이 어떻게 하면 힘을 다시 얻게 될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제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배터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걸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에, 배터리가 또 죽어 버렸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차 배터리를 계속 충전해 주는 것이 ‘올터네이터alternator’라는 것을. 올터네이터가 고장이 나면, 차 배터리가 절대로 충전이 되지 않아요. 배터리가 새 것이고 비싼 것이라도 상관없이, 며칠 후면 죽어 버립니다. 그렇게 올터네이터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던 기억이 났습니다.
중풍병자 애니아아 과부들은 마음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이 충전되려면, 올터네이터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누가 올터네이터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 믿는 자들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비다 같은 여제자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우리가 올터네이터와 같은 존재입니다.
4.
오늘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예수 믿는 사도 베드로와 다비다를 통해, 중풍병자와 과부들의 마음이 충전되었습니다. 특히 과부들은 다비다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다비다가 죽자 베드로에게 와서 울는 장면이 상상되면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위로 받았으면, 그들의 마음이 충전되었는지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존재가 없는 상실감에 과부들이 운다는 생각에, 제 마음이 움직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마음이 제게 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사도 베드로와 다비다와 같은 제자가 되었으면 하는 겁니다. 특히 마음이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주님이 일하심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환상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바로 드는 생각이 이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비다는 너무 엄청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감히 그들을 따라 갈 수 있을 지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번에는 예전에 보았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도시 사역을 하시는 이태후 목사님을 소개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흑인들이 사는 동네에 사역을 하시는 분입니다. 한인 목회를 7년쯤 하시다가, 도시 빈민가에 들어가 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바의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이 기억하기로를 이렇습니다. 이 곳에서 사는 흑인들의 삶은 매우 참혹하다는 겁니다. 폭력이 난무합니다. 마약으로 사람들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 문제도 심각하다는 겁니다. 이들에게 삶은 고난입니다. 사는 게 지옥입니다. 이곳에서 욕 먹는 방법은 ‘하나님은 당신은 사랑하십니다’ 라는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목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어도 문제입니다. 문화도 다릅니다. 그들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방전된 사람들 같습니다. 어떤 해결 방법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그렇지만, 이태후 목사님에게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살게 된 이 목사님이 하신 일은 집 앞 청소하기였다고 합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거리가 아주 지저분해도 자기 집 앞을 치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빗자루를 들고 집을 치우고, 이웃에게 화분을 나눠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무시도 하고, 욕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목사님은 그저 그들과 더불어 사셨다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줍니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밥을 줍니다.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에게는 집에 빨리 들어가라고 말해줍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줍니다. 그렇게 수 년을 그곳에서 사시고 계십니다. 그랬더니 마을에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마음이 방전된 사람들이 올터네이터 같은 이 목사님과 살다가 충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사람’ 이것이 이 목사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영상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있는데요. 이 분이 한국에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자기가 사는 동네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옆 집 꼬마에게 한국에서 사온 옷을 선물합니다. 꼬마가 물어요. 왜 자기에게 이런 선물을 주느냐고. 이 목사님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너는 특별한 아이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은 특별하지요. 그 아이가 그런 존재입니다. 아이 마음이 사랑으로 충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비다가 한 일이 이 목사님이 한 일과 비슷합니다. 다비다는 과부들을 도왔습니다. 그냥 도운 것이 아니고요. 자기의 힘을 다해 그들을 도왔습니다. 과부들의 마음이 충전되었습니다. 디바다가 한 일은, 옷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느질을 잘하는 주님의 여제자, 다비다 또는 도르가라는 이름의 사람. 주님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다비다의 손이 주님의 손이 된 것입니다. 다비다를 통해 혼자서는 충전이 되지 않는 마음이 방전된 사람들에게 올터네이터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뭘 잘하세요? 하나님이 그걸 사용하세요. 여러분에게 있는 것, 그것이 주님 손에 들리면 엄청난 것으로 바뀝니다. 잘 하는 게 없어도 됩니다. 마음이 방전이 이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 그들을 정죄하지 않을 수 있으면 됩니다. 이태후 목사님처럼 청소하기, 요리하기 이런 것도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작은 것으로도 마음 방전이 일어난 사람들에게는 조금씩 마음 충전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비다처럼 살 수 있을까요. 우리도 다비다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특히 삶이 고난이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통해 주님이 일하십니다. 올터네이터가 되게 하십니다. 마음 방전이 된 사람들을 충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이 회복된다면 그것 자체 만으로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꿈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런 환상을 보았으면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베드로도 애니아에게 올터네이터 같은 존재입니다.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지 8년이나 된 사람에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데 곧 일어나’
베드로의 말처럼, 중풍병자인 애니아를 낫게 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저는 베드로처럼 말은 못할 것 같아요. 베드로처럼 말했는데 중풍병자가 안 일어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처음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어요. 우리 주변에는 애니아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분들도 있지만, 영적으로 마음이 중풍병자 같이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건강해 보여도 마음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의 명령을 전할 수 있을까요?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라고 말입니다. “ 주님이 방전된 당신의 마음을 충전하시길 원하십니다. 힘 내세요” 라고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향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지요. 그저 그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겁니다. 몸이 일으켜 줘야 하면 일으켜 주는 일입니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생겼는데요. 영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전하는 겁니다. 삶이 고난이 사람들. 삶이 슬픈 사람들. 삶이 저주인 사람들. 삶이 무기력한 사람들. 마음이 지쳐 버린 사람들. 마음이 방전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주님의 명령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힘을 주시니 이제 일어나서 여러분의 자리를 정돈하세요’ 그러자 그들이 일어나게 되는 환상을 여러분이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육체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이 일어나는 게 쉬울까요? 영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사람이 일어나는 게 쉬울까요? 어느 쪽이 더 큰 기적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상한 마음이 회복되고, 방전된 마음이 충전되는 은혜를 통해,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니라” 이 은혜가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있기를 기도합니다.
5.
그런데요. 오늘 본문에는 다른 관점에서 마음이 방전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욥바에 있는 다비다라는 여제자 입니다.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심히 많이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면 보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병들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은 돌보지 못한 여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어짜피 없어질 육체라고 하면서, 자신을 소진하고, 소진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은 살리고, 자신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번아웃이 된 것입니다. 아예 타 버린 것입니다. 결국 다비다는 시체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다비다 처럼 병에 걸려도 돌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쉬어야 하는데 쉬지 못한 다바다가 지금도 있다는 겁니다. 일 복이 터진 사람이 있습니다.
과부들이 나중에 깨달은 것이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자기들 때문에 산화되어 버린 다비다를 발견한 것입니다 .다비다를 통해 그들의 삶에, 또한 그들의 마음이 충전되는 경험을 하며 살았는데, 이제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우를 범하고 있지 않을까요? 선행과 구제를 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단해, 고마워“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들을 진짜로 배려하고 있는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 구제를 하는 이들이 번아웃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역자가 번아웃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형제들, 자매들이 번아웃될 때까지 가디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마음이 충전되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충전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자신을 완전히 태워버린 다비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없게 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오늘의 다비다로 사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완전히 방전된 현대판 다비다. 그들을 위한 주님이 내리신 처방전이 사도 베드로입니다. 과부들도 딱하지요.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고 말은 못하지만. 사실은 살려 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처음에는 난감했을텐데, 그가 사람들을 다 방에서 내 보내고, 영과 육이 완전히 방전된, 시체로 누워있는 다비다를 위해 기도합니다. 40절에 그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돌이켜”라고 되어 있는 것은, 베드로가 등지고 다비다를 위해 기도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도 주님이 확실한 증거를 주실 때까지, 주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도했음을 보여줍니다. 번아웃된 사역자들, 그래서 다시는 사역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들. 선행과 구제를 힘써 하다가 온 몸이 부서진 사람들. 그래서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 그 분들을 위해 우리도 사도베드로처럼 기도하길 바랍니다. 그 기도가 시체와 같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살릴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이 보여주신 환상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꿈입니다.
2020년 2월 16일, 수요일입니다. 사순절 시작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 함께 금식하며 (한끼 든 두끼든 하루 종일이든) 기도하길 원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과 친적들, 동료들, 친구들을 위해 금식하며,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다비다처럼 주의 일을 하다가, 번아웃이 되어버린 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타 버린 사람들. 마음이 방전된 사람들이, 바라고 기도하기는 주님이 보내주신 분들로 인해 마음 충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사도 베드로를 통해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충전시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터네이터가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한 주님의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올터네이터가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서로 손을 잡아 주세요. 또한 서로를 위해, 골방에서,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을 때,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래 전에 멤피스 땅에 심겨진 씨앗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이 심으신 거라고 믿습니다. 바로 비전트리센터입니다. 이 단체에서 하는 일이 지금은 한글학교 일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센터의 DNA에는 오늘 본문과 같은 것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마음이 소진된 사람들이 회복될 수 있는 곳. 마음이 소진된 사역자들이 회복되는 곳. 그런 교회 같은 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런 교회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씨앗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껍질을 깨고 세상의 풍파와 마주치려고 하는 용기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물질로 기도로 그들을 돕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 충전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올터네이터 같은 교회가 되기를 또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같은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중풍병에 걸려 있는 분들, 젋은 과부, 나이든 과부. 어르신들을 돕는 일과 아이들을 돕는 일에, 그들을 위해 무릎꿇고 기도하는 그런 공동체가,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찬양} 누군가 너를 위해 기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