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의 탄생과 부흥, 그리고 초대 교회 안에 있었던 핍박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교회 밖에서 불어온 핍박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핍박이라는 폭풍 한 가운데에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시는 것처럼,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위협했고, 사람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살기가 가득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참 무서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예수 믿던 사람들이 치를 떨 정도였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어느 순간 예수를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사람이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바뀌어도 어느 정도 바뀐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시겠나요?
하나님은 에수를 가장 핍박했던 어마무시한 사람을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뀐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사도 행전에도 여러번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하면 아마도 수 백번은 같은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그 만큼 그에게 충격적이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이 변했고, 그의 삶의 목적이 바뀌어 버린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여러분은 보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보면, 사울은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것과도 관련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어식 이름입니다. 나중에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살게 되고, 그 이후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이 분명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울이 경험했던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아니 성경 전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메세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우리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울을 찾아가 주셨고, 그를 만나주심으로 그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의 제자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빌립과 에디오피아 환관장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빌립에게 광야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습니다. 누구를 향한 환관장을 위한,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 나아가 그 나라의 후손까지를 위한 하나님이 계획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환관장의 열심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성경을 읽었던 그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그의 열심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빌립을 보내서 그에게 구약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소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환관장을 위해 가장 적합한 사람을 준비시켜 주셨고, 진리를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유대인에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남자와 여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성성을 잃어버린 한 사람에게도 이르렀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정을 보시길 바랍니다.
2. 사울은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까?
그렇다면 사울은 무슨 이유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까요? 그의 마음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요 16:1-3)’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첫번째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있는 분노는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닌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빠져 있는 것에 대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사울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협하고, 옥에 가두는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종교심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때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엉뚱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한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사울이 교회를 핍박했던 이유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뽑아서 정리한 613개의 율법을 철두 철미하게 지켰고, 이렇게 살아야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 5-6절을 보면 사울이 자신을 이렇게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라’
사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고 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그가 믿었던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을 핍박한 것입니다. 정의가 불의한 사람들을 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사울은 이런 자신의 고백을 ‘해’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로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7).’
바울에게 유익했던 것,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는 것 조차도, 해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온 세상이 죽게 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동의를 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의롭게 살았다. 나는 법률을 어겨본 적이 없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돕고 섬기는 일을 했다’ 라고 말입니다. 십계명으로 따지면, ‘나는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내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내 이웃의 집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이웃집 아내와 그의 종업원과 그의 소유를 탐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시고 계시다면 정말 잘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는 일이 교회를 핍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곳,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곳, 그 곳이 교회입니다. 자신의 의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했던 것입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인데,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자신의 의로 다른 사람들의 정죄함으로 자신의 의가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기는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의롭기 때문에 교회갈 이유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마다 ‘우리는 죄인이다’는 말이 이해도 가지 않고, 동의하기도 싫은 말이기도 합니다. 사울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빛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3. 예수의 빛이 임하는 삶
사울은 오늘 본문에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를 만났습니다. 그 빛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것도 사울에게 집중적으로 비추였습니다. 사울의 인생을 바꿔 놓는 그 빛은 사울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울에게 비추인 예수의 빛은 사울을 땅에 엎드리게 합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에게 한 음성이 들립니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지만 사울에게만 들린 특별한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이 나옵니다.
사울이 직감했던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주님이시다. 그런데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한 질문을 합니다. ‘누구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사울이 섬기는 하나님이신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열심으로 섬겼던 하나님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이 충격을 받았겠지요. 자신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오히려 핍박하고 있었고,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울이 교회를 핍박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몸을 무시하고, 핍박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빛을 본 사울은 육체적으로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리고 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지냅니다. 그가 그 시간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지난 시간 동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했던 일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울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 이후에 사울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아시나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사울은 자신이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변화가 보이시는지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 죄인 중에 가장 나쁜 죄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가장 나쁜 죄인의 자리를 빼앗긴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쁘더라고 2등 밖에 못합니다. 사울이 1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빛이 그의 육체적인 눈을 멀게 했는데, 그의 영적인 눈이 떠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눈이 예수의 빛으로 눈이 멀면서 생긴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의로운 줄 알았는데, 영안을 뜨고 보니까 내가 1등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의 영적인 눈은 뜬 것이 아니라 보이지 못했던 것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면 보게 되는 것이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떠지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적나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이것은 마치 조용한 방에 한 줄기 빛이 비추이는 것과 같습니다. 겨울처럼 추운 날에는 더욱 그리운 것이 빛입니다. 그 빛이 방을 비추면 보이기 시작하는것이 있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먼지입니다.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는 먼지는 빛이 비출 때 보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예수의 빛이 비추이면 생기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먼지같은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비추일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영안입니다. 영안이 떠졌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깨끗하게 하려고 먼지를 털어내도 방 안에는 더 많은 먼지가 일어나듯이 우리 안이 더욱 죄악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울의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영안이 띄어지지 전에 그는 정의를 행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는 일이 정의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 빛이 비추자, 충격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으로 하나님을 핍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일 동안 아무런 음식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려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그의 인생을 뒤 흔들어 버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변론이었습니다. “제가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 온 맘과 정성과 뜻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 되어 버렸음을 알게 된 그날, 사울이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겠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그 날 그가 경험했던 빛의 강도는 그의 간증에서 조금씩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울의 간증이 세 번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 3 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도행전 22장 6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사도행전 26장 13 절.”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데..”
9장에서는 시간에 대한 특별한 시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가, 22장에는 오정 쯤으로, 26장에는 정오로 되어 있습니다. 하루 중 정오는 해가 가장 높은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에 정오는 하루가 해가 하루가 가장 밝은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해를 봐도 눈이 머는데, 그것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다고 사울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마음에 비추었던 빛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고 있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빛이 강하면 강할 수록 사울이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악함입니다. 그 악함을 보면서 사울은 얼마나 괴로워했을까요.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빛이 그에게 강하면 비추일수도록 그는 자신의 죄인됨을 더욱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그가 깨닫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에게도 주님의 빛이 비추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깨닫게 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예수의 피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