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드렸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께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례히 행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참으로 무례히 행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스스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낭비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 26:11)’ 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되심을 기억하며 살자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끝에 주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의로우신 재판장 되시는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2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부자로 살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살면 좋겠는데, 반대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반역하는 사람들이 다 평안한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자녀들은 좋은 환경에서도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사회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심이 우리 안에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라는 사실이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선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악인이 승리하는 세상, 공정하지 않은 세상이니 말입니다.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상처 투성이 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선하게 살아야 합니까? 악인만 형통하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악인이 더 평안한데 말입니다. 의로운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것인가요?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땅을 살면서 손해보고, 고생하면서 주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실 의향이 여러분에게는 있으신가요? 악인이 형통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혼란스러운 우리 마음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3.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혼란은 성경에도 나옵니다. 먼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을 무슨 까닭이니이까 (렘 12:1)’
비슷한 불평이 시편 73편에 나옵니다. 아삽이라는 시인의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1절)”
아삽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였습니다.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뻔 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아삽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넘어질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아삽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공의가 살아 있지 않는 세상을 보면서 자꾸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 넘어질 뻔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15절에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도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 옷이다. 그들은 피둥 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 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 있을랴?하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 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하나님, 주님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삽도 괴로웠습니다. 이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신데, 악인이 잘 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4.
아삽 시인이 느꼈던 절망감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악인이 더 형통하고, 부자로 살아가는 세상,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 아삽은 절규하고 절규했습니다. 그런 아삽의 고민이 16절과 17절에 보면 해결됩니다.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을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는 이유를 알아내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에 절대로 풀리지 않는 고민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다가 아삽이 깨닫게 됩니다. 언제요?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을 깨닫게 됩니다’
‘성소에 들어갔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간 시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깨달은 내용이 18절에서 20절에 나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 낮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아삽에 깨달은 것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전의 삶도 모르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더욱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심판장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5.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되지만, 죽음 이후에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가 행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주님의 심판이 이 땅에서 유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심판이 다소 늦춰진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이 사실을 깨달은 시인이 위로를 얻습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나는 우둔하여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의로우신 주님이 살아계신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악인의 삶이 부러웠지만, 그것을 깨달은 시인이 자신을 한 마리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깨달음을 얻은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3-24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되는 그날, 주님이 주님의 영광에 자신을 참여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이 발견한 복이 25-26절에 나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다로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시인에게 복은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삶의 전부가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돈 보고 결혼했다’ 이런 결혼 생활은 행복할까요? 제가 읽었던 신문 기사에서는 그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습니다. 돈 떨어지자 이혼했다고 했습니다. 반면 내 신부가 전부이고, 내 신랑이 전부인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이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는 지니처럼 되었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단지 건강과 돈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을 우리 삶의 부속품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천국은 그냥 덤으로 얻는 것처럼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만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도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삶의 목적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삽이 깨달은 것처럼 말입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잠언 21:4)’
악인이 형통하는 것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제게 이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악인의 삶을 보면서 그렇다 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악인이 형통하는 다 죄다. 따라서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죽음 이전의 삶은 우리가 다 모르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