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끔 읽는 책이 있습니다. ‘빛나는 인격’이라는 제목의 책인데요.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던 책입니다. ‘빛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빛나는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예절’에 대한 내용인데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제 그만 가봐야 겠네요’ 라는 단원은 ‘상대방이 베푼 친절 남용하지 않기’라는 소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호의의 숨겨진 대가는 감정일수도 있고, 육체적 에너지일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한 사람에게 마땅한 존중심을 보이는 길은 예의상 하는 제의를 남용하거나 적절한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여 교인의 병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둘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급한 일이 없던 젊은 목사는, 자신의 역할에 혼자 심취해고, 그녀도 자신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고 해요. ‘절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너무 피곤해서 더 애기할 수가 없어요”
목사는 그녀의 상황에 무심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우면서도 솔직하게 말해준 그녀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반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처럼 단지 예의상 연기를 하는 것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자 분이 따뜻하게 맞아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중해야 할 경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경계를 넘는 것은 무례한 짓입니다.
상대방이 베푼 친절 남용하지 않기. 경계를 넘어서지 않기. ‘이제 그만 가 봐야 겠습니다’ 라는 말에 담겨진 배려인 셈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교차했습니다.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상대방이 베푼 친절을 남용하지는 않았는지, 어떤 경계를 넘어시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틀림없이 저도 이런 적이 있을 겁니다. 빛나는 인격을 가지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려운 이유일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으시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말도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사랑’이라는 말울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어른이건 아이건 자기 스타일로 사랑을 이해하고 표현합니다.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선물로, 봉사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칭찬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히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면, 방금 읽은 성경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하나님’ 또는 ‘예수님’으로 바꿔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참고, 하나님은 온유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현대의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배려하심, 또는 은혜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무례하다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시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무례하기 그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도 무례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도 무례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현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께 참으로 무례했습니다. 성경 곳곳에 나온 내용들을 요약해 보면, 하나님께 무례한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 하는 과정을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노예에서 해방 시켜 주셨고,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모든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사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무례하게 행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평안해지면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참으로 무례하기 그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백성들도 사랑해 주셨지만, 백성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무례히 행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아실겁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유산으로 받을 몫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유산을 받은 아들은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에게 가서 허랑방탕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떨어지고 배가 고프자, 그는 돼지의 밥인 주엄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치욕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 때 그가 아버지께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이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서 두 팔을 벌려 탕자를 맞이해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혼내기는 커녕,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베푼 은혜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아들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황송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히 혼나야 하는데, 아버지가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다음날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에 힘입어 그가 담대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 봅시다.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지요. 제게 다시 돈을 주시면 다시는 예전처럼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녁 한 끼 잘 얻어 먹고 나니까. 옛날 습관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둘째 아들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면, 이렇게 표현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배려를 무시한 무례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또는 그가 아버지의 용서하심, 아버지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나아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런 일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는 그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전 모습으로 뒤 돌아가 버리고 있습니다. 잠언은 이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 26:11)’
현대 교회에서 믿음을 강조하다가, 행위는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맞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남용하거나 하나님께 무례히 행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교회가 받고 있는 비난일 수도 있습니다.
3.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설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소개합니다. 베드로의 설교 내용에서 바뀌 부분도 이 부분인데요. 예수는 만유의 주님이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만물 위의 뛰어나신 분이시다.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설교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든 하셨으며, 그는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했다고 설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하심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정리하는 예수의 모습이 42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명하세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도하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있는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라고 하신 내용이 무엇인가요? 예수 믿으세요 라는 내용인가요? 아닙니다. 예수가 누구신지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해준 복음에 대한 전도 명령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 역사의 끝에서 산자와 죽은 자를 전부 재판하실 것이므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도는 우리의 말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초점어져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몇 명을 전도하느냐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 답게 향기를 내면서 살았으며, 빛으로 소금으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판정 앞에서 우리가 서게 될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그 나라의 정의로움은 그 나라의 사법부가 말해줍니다. 정의로운 나라일수록 법에 따른 바른 판결이 내려집니다. 예수께서 재판장이신 나라. 그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 모두는, 언제쯤인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제게 뭐라고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송태근 목사님의 ‘쾌도난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습니다. 몸은 마비되고, 정신은 무의식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못하고, 죽은 시체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의사가 분주하게 왔다갔다하고 식구들이 수선 피우는 모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최종적으로 검진하더니 이렇게 선언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운명하셨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사람은 용을 써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움직이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때 자신의 한 쪽 손가락 중 반 마디가 까닥거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사는 죽었다고 판정을 내렸고,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고 생각이 그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마침 침대 옆에 아내가 서 있기에 살아 있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아내를 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이렇게 보다가 손을 탁 치면서, ‘죽었다잖아’ 하더랍니다. 결국 하얀 보가 얼굴에 덮이고 철침대에 실려 안치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안치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안간 힘을 써서 손가락으로 아내를 한 번 더 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의사 말 들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 안 당하려면 평소에 잘했어야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이 이야기의 메세지는 평소에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아무렇게나 살다가 예수 믿으라고 하면 너나 잘 믿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고넬료에게 들려주신 복음은,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만유의 주되신 주님께 우리가 경의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판장이신 예수께 우리가 구할 것은 그분의 은총, 은혜 베풀어 주심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심판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처럼 선을 행하고, 예수 처럼 이 땅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신 주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마 이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