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착하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일주일 동안 ‘착한 일’ 한 가지씩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착한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매 주 한 가지씩만 하셔도, 일년이면 52가지나 됩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 선한 것들을 차곡 차곡 쌓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는 다른 점은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 버리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만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입니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12세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달리다굼’ 작은 아이야 일어나라! (막 5:35-43). 이렇게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놀랍지만, 이들은 모두 다시 죽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들의 부활과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고, 다시 죽지 않으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 무덤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섬기며, 따르며, 사모하며,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 닥친 문제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주님의 영광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너무 크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 앞에서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고, 마치 소망이 없는 자처럼 살고 있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부활의 신앙이 있으면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샌디에고 갈보리 침례교회에서 사역하셨던 “SM 락 지지” 라는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유명한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It’s Friday.. But Sunday’s coming’ 이라고 제목을 붙여 놨습니다. ‘금요일입니다. 그러나 일요일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잘 묘사하고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요일 입니다/예수님은 기도하시고/베드로는 잠이 들었고/유다는 배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
금요일 입니다/빌라도는 주저하고 있고/지도자들은 음모를 꾸미며/군중들은 비난하고 있습니다./하지만 그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주일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금요일입니다/제자들은 우왕좌왕합니다/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마리아는 울고 있고/베드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게 있습니다
/주일이 반드시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요일입니다/로마인들은 예수님을 때렸고/그에게 주홍색 가운을 입혔고/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하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주일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금요일입니다/갈보리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피를 흘리며/온몸이 비틀거리고/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그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단지 금요일 일뿐
/주일은 오고 있습니다.
금요일입니다/세상은 승리하고 있고/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고/그리고 악은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금요일입니다/병정들은 나의 구세주의 손을/십자가에 못 박았고/나의 구세주의 발도/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그리고는 십자가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범죄자들 사이에 말입니다.
금요일 입니다/하지만,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주일은 옵니다.
금요일입니다/제자들은 의심하고 있습니다/어떻게 그들의 왕에게 이런 일이 닥칠 수 있었을까/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축하하고 있습니다/자신들의 작전이/드디어 성공했다고/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지금은 단지 금요일이라는 것입니다/주일은 오고 있습니다.
금요일 입니다/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아버지에게 버림받음을 느끼며/죽도록 내 버려졌습니다/그 누가 그를 살릴 수 있을까?/오--/금요일입니다/하지만 주일은 오고 있습니다.
금요일입니다/온 땅이 흔들리고/하늘은 흑암으로 덮히며/나의 왕이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맡깁니다.
금요일입니다/소망은 온전히 사라졌습니다/죽음이 이겼고/죄가 승리했습니다/사단이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금요일입니다/예수님은 묻혔고/군인이 보초를 서 있습니다/무덤 입구는 돌로 막혀 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금요일입니다/단지 금요일일 뿐입니다/주일이 옵니다!"
3.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모욕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이 다시 사신 주일이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세상이 이긴 것 같았습니다. 금요일에는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이긴 것 같았습니다. 금요일에는 세상의 권세가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슬퍼 울었습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패배자의 눈물과 비겁함으로 가득차 있었던 날이 금요일 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요일에,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모든 것이 역전 되었습니다.
성경에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있었던 일인데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부활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부활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절망한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이 되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주일은 우리에게 기쁨이며, 주일은 우리에게 평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금요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일요일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주신 평안을 가지고, 주님이 주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4.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러므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은 ‘영광의 면류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운 면이 많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교회 다닌다’ 이런 이야기도 하기 어렵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너무나도 닮아버려서 그렇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구별이 안되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디옥은 지금의 터키의 ‘안타키야’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국 중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가는 대도시였다고 합니다. ‘동양의 여왕’이라는 명칭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최초의 이방인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구제 사업을 창시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웠던 것은 교회 안다니는 사람과 달라도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고 김준곤 목사님의 ‘민족 복음화를 위한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기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국제 시장에서 한국제 물건들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목사님의 기도에 “예수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보증 수표가 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삽시다! 이 말이 영광의 면류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요일 같은 현실 속에서 좌절하지 않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일요일을 기다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부활절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예수처럼 살아서, 그리스도인이 보증수표가 되는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꿈꿔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 처럼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듣게 될 칭찬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멤피스 한인교회 성도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16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 4:13-16)’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을 쓰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