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씨를 말리겠다며 다메섹으로 향하는 사울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계획도, 생각도, 그의 사명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파괴 되었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누가 사울의 눈을 멀게 했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사울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이유로, 사울이 눈은 떴지만 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주님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요? 주님께 함부로 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여주신 본보기 같은 것일까요?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복수도 아니고, 주님이 본 때를 보이신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많은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욕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침 뱉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수모를 당했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나를 못 박아!’라면서 고함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으셨습니다. 엄청난 권세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모욕했던 사람들. 십자가에 못 받았던 사람들. 의리없는 제자들도 혼내거나 복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용서하시고,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박해하는 사울의 눈이 보이지 않게 하신 것은, 그를 미워하거나 벌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사울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울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 어려움이 생기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이 그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새롭게 하려는 주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울의 반응도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분노하지 않았어요. 자신에게 힘든 일을 생기게 하신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를 힘들게 하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가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예수 사랑합니다. 예수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런 하나님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 우리 삶에 주님이 주신 어려움이 있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지는 않을까요?
주님이 나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논쟁하고 분노하지 않았을까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울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침묵하며, 기도하며, 금식하며 주님의 뜨을 찾기보다는, 주님을 향해 화를 내기도 욕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기다리지 못하고, 증오와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슬픈 현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로 주님과 절대로 화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일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이것이 아닐까요.
주님이 우리를 힘들게 하실 수 있어요. 사울처럼 눈이 보이지 않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해질 때까지. 주님이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실 때까지 입니다.
이렇게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울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계획이 실행된 것입니다.
주님은 사울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셨어요. 주님은 사울이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통해 이방인 사역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주님의 계획 중에는,
그가 볼 수 없게 되어, 다른 사람들 손에 이끌려 다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8절-9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에게 보내야 했던 사흘은 무덤 같은 삶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도 또한 지나갑니다. 그리고 18-19절과 같은 날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18-19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 있습니다.
사울을 향하신 주님의 뜻은 “치유와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도, ‘치유와 회복’에 있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2.
사울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과정을 살펴볼텐데요. 사울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신 주님이 직접 나서서 그를 고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은 사울의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통해 앞으로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를 격려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사울을 새롭게 하는 일에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길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좋아하십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사울을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시며, 주님의 사명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아나니아’. 주님의 메신저가 된 아나니아.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에 대한 기록은 오늘 본문에 소개된 내용이 전부입니다. 사울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그가 한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일 후에는, 그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면, 아나니아는 그렇게 튀는 사람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님의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감당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독교 역사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에 뽑힌 사람인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도 소망을 줍니다. 그렇지 않나요? 튀지 않아도. 평범해도 주님이 사용해 주신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 ‘아나니아’였을까요? 아니 하필 ‘아니니아’였을까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것도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 된 이 순간에,
초대 교회에서 쟁쟁한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이, 주님의 메신저가 되었을까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요. ‘왜’라는 질문이 ‘그렇구나’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 귀인, 아나니아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아나니아는 유대인입니다. 그렇지만 그 앞에 붙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경건’입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12절에 사울이 간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나니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율법을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이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경건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챤들을 향한 ‘시대적 요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게 아나니아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이기도 합니다. 왜 소망이 되지요? 우리는 능력이 없지만, 경건하게 살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크리스찬이 바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크리스챤이 빌리그래함 목사처럼, 존 파이퍼 목사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허드슨 테일러 같은 전도자가 될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주의 성도들은,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사전에 ‘경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경건하게 살아야 됩니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세속에 물들지 않고 어려운 중에 있는 자를 도와주는 태도라고 말한다 (약 1:27)’
또한 사도행전 22:12절 말씀처럼, 경건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는 심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나니아’처럼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 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기도했으면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부모들도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10절: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지요. 주님을 배우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주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제자는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 주님께 배운 것을 행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이 내 제자” 라고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주께서, 주님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아나니야’였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지만, 우리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을 특징짓는 ‘제자’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주님의 제자로 산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아나니아 같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경건한 삶을 사는 주님의 제자. 우리에게도 이런 수식어가 필요합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수식어입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주님의 제자, 아무개. 그 아무개의 이름에 여러분의 이름이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아나니아는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부르십니다. ‘아나니아야’ 그러자 아나니아의 대답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디에서 많이 듣던 대답이 아닌가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하시니,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부르실 때의 대답입니다 (창 46:2). ‘여기 있나이다’
주님이 사무엘을 부를 때, 어린 사무엘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16).
주님이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아나니아의 대답에서 구약 말씀과 같습니다. 그가 구약의 말씀에 익숙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약 말씀을 잘 알아도 아나니아처럼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어떻게 대답하는지 알았고, 알고 있는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도 영광이지요. 그 영광을 누린 사람이 아나니아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니는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쉬운 대답이 아니라는 것은 사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물론 이 질문도 중요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도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도 종종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대답은 준비된 사람의 모습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행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나니아는 달랐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소서. 내가 행하겠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쓰시고자 할 때,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사울처럼 당황합니다. ‘주여 누구이나이까’ 라고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아나니아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환상 중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차린 아나니아의 모습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정리해 보면, 주님이 쓰신 아나니아는, 경건한 사람. 주님의 제자.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으로? 말씀과 기도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아나니아처럼 대답할 수 있을까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쓰임을 받기 원하면, 우리는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직장을 잡으려고 해도, 우리는 그 직장에 걸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훈련도 받아야 합니다. 많은 시간과 수고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길이 열리면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준비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자를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사울도 어떤 면에서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단지 그에게 부족한 점은 ‘그는 자신이 박해하는 예수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것을 알고 깨달은 사울은 눈을 뜨자마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파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준비되어지길 원합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이 원하는 것을 깨닫고 준비되어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준비된 자를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넷째, 아나니아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아 아나니아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사울을 만나서 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을 걱정한 것입니다. 사울이 행했던 일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특히 믿는 주의 성도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사울을 부르신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한 택한 나의 그릇이라’ (15절)’
주님의 설명을 들은 아나니아는 즉시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있는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합니다. 사울에게 안수하는 아나니아가 이렇게 사울을 부릅니다. ‘형제 사울아’
아나니아는 사울을 핍박자 사울아. 원수 덩어리, 골치 덩어리 사울아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그 말씀에 아나니아가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척 한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울에게 안수했습니다. 사울을 주님이 택하신 그릇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형제 사울아’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서운한 마음도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따릅니다. 사울을 안수하는 그의 손도 거리낌이나 주저함이 없습니다. 사울이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하면 됩니다. 아나니아는 사도도 아니지만, 그가 안수하자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그 누구. 그 누구를 향해 가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가 눈을 뜨면 마음이 변해서 핍박자로 바뀔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느낌이나,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제자의 모습입니다. 순종의 열매는 달콤했습니다. 주님이 사울을 통해 역사하심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나니아의 안수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현대 교회는 안수를 목회자에게만 국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했어요. 다른 사도들이 그런 게 아니예요.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안수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크리스챤이, 주의 성도가, 사울에게 안수한 것입니다. 저는 아나니아의 안수가 사울의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을 녹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따뜻함이 아나니아의 손을 통해 사울의 마음에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세요. 형제의 몸에 손을 얹고 우리도 기도할 수 있을까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는 기도 밖에 할 수 없지만, 가까이 있는 그 누구를 위해서는 손을 잡고,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음이 상한 사울.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사울. 어둠에 있는 사울. 혼란 스럽고 공허한 사울.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울.
오늘날의 수 많은 사울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병이 고침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아나니아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어쩌면 딱 한 번 그가 경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무너진 형제의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거 까지 우리가 하는 겁니다. 나머지는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치유와 회복. 주님이 준비되고, 순종하는 아나니아를 통해 행하신 일입니다. 준비되고 순종하는 우리를 통해,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도, 아나니아처럼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위대한 선지자, 목사, 전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은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우리도 주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연약한 무릎을 가진 형제 자매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대사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로, 우리도 아나니아처럼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평범한 성도들을 대표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심장으로 주님의 택한 그릇을 찾아 떠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