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아, 신상우의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찬양곡 중 하나인데요. 여러분도 잘 아시거나,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찬양입니다. 찬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지난 한 주동안, 이 찬양은 여러 번 부르고 묵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요. 찬양을 부르면 부를수록 찬양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렇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분이시며, 주님은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또한 나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까, 다윗이 이 찬양을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윗은 악기도 잘 다루고, 어릴 적부터 양 떼를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기에, 이 찬양도 멋지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찬양이 그의 삶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목동이 왕이 되고, 동굴에서 살던 사람이 백향목으로 지어진 궁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가족에게 조차도 외면 당하던 사람이, 이제는 온 백성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강해졌고, 평안해 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이 찬양을 부르면 더 멋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
다윗의 찬양이 끝나면, 우리도 다윗이 부른 찬양에 아멘! 이라고 화답하겠지요. 한 나라의 왕이 된 사람이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2.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어떤 교회 사랑부 청년들과 가족들이 이 찬양을 부르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부 청년이라 함은, 한국 교회에서는 신체적인 장애나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 부서를 일컫습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말을 잘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형제들이, 이 찬양을 부르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제 마음이 뭉클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는 찬양도 여러 번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찬양을 들으면서,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꼭 무엇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데, 그것도 아닌 사람들이, 어쩌면 불평을 쏟아낼 것 같은 사람들이, 나의 나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임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비보셋’이 경험한 것도 바로 사랑부 청년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므비보셋은 두 발은 저는 장애인입니다. 그는사울의 손자이고,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그가 왕족이라는 뜻이지요. 왕족하면 평안한 삶을 살 것이라고 연상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섯 살 때,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같은 날에 잃어버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울 왕과 아버지인 요나단이 전사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어버리는 상실의 경험은 매우 큰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족을 잃은 상실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울 왕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모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모는 그의 왕을 죽인 블레셋이나 또한 사울이 집요하게 죽이고 했던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처들어 올까, 자신을 죽일까 염려해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허둥대다가 그만 유모는 므비보셋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므미보셋은 평생동안 다리를 저는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무슨 특별한 죄가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섯 살 꼬마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애인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을 빌리면, ‘성하고 똑똑하고 건강한 사람들만 인간 대접을 받는 세상에서, 므비보셋은 외면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와 인간 대접 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므비보셋이 살고 있었던 곳은 ‘로드발’이라고 곳입니다. ‘로드발’은 목장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땅, 비옥하지 않은 땅, 열매가 없는 땅, 가치가 없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므비보셋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므비보셋이 머무는 곳은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에게 돕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도 되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섯 살이면, 한참 부모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는 시기에, 므비보셋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고, 또한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으며,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의 삶이 참 처량하고, 가엽습니다. 이런 므비보셋에게 소원이 있다면, 갑자기 죽지 않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고 오손도손 오래 살다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므비보셋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 왕이 그를 찾는 소식과 함께 누군가 자기를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이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이 찾아 온 것입니다. 다윗 성에 가까워질수록 므비보셋이 얼마나 두려움이 떨었을지 알 수 있습니다. 왕권이 바뀌면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상식이던 시대이기에, 그 날이 왔다고 므비보셋이 생각했을 겁니다. 므비보셋이 살 길은, 딱 하나입니다. 다윗 왕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형편이 없는지, 또한 왕을 대적할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을 거예요. 그것은 바로 절뚝거리는 자신의 두 다리입니다. 사는데 불편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이제 자신의 부러진 두 다리는 다윗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된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다윗 앞에 엎드린 므비보셋에게 다윗 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므비보셋이여’ (6절).
므비보셋에게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왕의 목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이 나오면, 항상 상상을 해 봅니다. 다윗이 어떤 목소리로 므비보셋을 불렀을까 하고 말입니다. 왕의 근엄함을 담은 목소리 일까, 아니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을 더욱 공포에 빠뜨리는 음성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다윗이 한없이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므비보셋의 이름을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므비보셋이 누구인가요.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잊혀지길 바랬던 사람입니다. 누군가 자기의 이름을 부를까봐 두려워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므비보셋이 믿기조차 어려운 것들입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할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주겠다고 한 것도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을 왕의 식탁에 초대한다는 말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 왕의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8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절하며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무슨 말인가요. 아무 가치도 없는 자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왕자로 대접 받으며 살게 한 것에 대한 놀라움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시 태어난 날, 중생한 날, 구원 받은 날의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비보셋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죄로 원수되었던 자에게 왕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왕의 식탁으로 초대하신 사건이 구원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신의 삶이 므비보셋과 같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위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죽은 개와 같이 아무 가치도 없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왕의 자녀로 불러주신 복음이 들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저의 이름을 부르시고, 여호수아 말씀을 통해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던 그날 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외롭고 씁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에, 내가 가치 없게만 느껴지고 있을 즈음에, 주님이 저에게 찾아와 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날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가치없는 자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처럼 대하는 것은 ‘사랑’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므비보셋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따라서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의 고백은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하는 고백이 아니라, 므비보셋과 같이 상처 받은 영혼에게 하나님이 찾아가 주셔서,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해 주시고, 생명을 주시며, 삶을 가득채운 풍성함을 주시고,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자신있게 이 찬양을 불렀으면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이 없는 은혜,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깨닫고, 그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또한 므비보셋의 삶은 우리에게 현대 교회의 사명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는 므비보셋과 같이 장애인들로 대표되는 소외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교회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나요? 이런 질문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복음 9:1-7).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이니까.”
이 질문은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이 장애인을 보아 왔던 시각이었습니다. 죄가 많아서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눈이 안 보이시는 분이 있지요. 바로 킴 선교사님입니다. 이 분의 특징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누군가 차를 타고 가서 모시고 와야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또 댁으로 모셔 드려야 합니다. 선교사님이 자기를 픽업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며 운전을 대신(?)하시겠다고 하신 적이 있지만, 이를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시장을 혼자 갈 수도 없습니다. 컴퓨터에서 낯선 메세지가 나오면, 그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볼 수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종종 목격합니다.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누군가 손을 잡아 드려야 하고,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식사도 누군가 도움을 줘야 합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평생 킴 선교사님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킴선교사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도 킴 선교사님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하루 하루를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 제 손을 잡아 주세요. 그리고 저를 이끌어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살아온 세월이 70년이 넘었습니다. 하나님이 육체적으로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그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킴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삶의 메시지가 들리시길 바랍니다. “나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김두식이라는 분이 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그마나 괜찮은 교회’라는 평가를 듣는다고 합니다. 소외된 이웃을 돌본다고 언론의 조명도 여러 차례 받기도 했고, 목사님도 돈 벌어서 남 주자라고 설교하시고, 그렇게 사실려고 노력하시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자기 교회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교회가 소외된 사람을 돕는 교회는 맞지만,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은 없는 교회라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많은 교회의 딜레마가 이것입니다. 소외된 사람을 돕는 교회는 많지만, 소외된 사람들, 연약한 자들과 더불어 사는 교회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진단합니다.
‘교인들 모두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자는 메시지는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자는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조금 나눠 주고 나니 더 부자가 되더라는 메시지는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메시지는 부족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윗이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러서 함께 살자고 한 부분은, 현대 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교회가 아니라, 모든 이들과 더불어 사는 교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기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은 사명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은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일입니다.
3절에 보시면,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다윗은 자기가 베푸는 은총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베푸는 은총은 일반적으로 진실된 감사의 보답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갚는 것이 미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그런 기대가 없습니다. 그냥 관대하게 아낌없이 넘치도록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라, 사랑의 내용도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받은 은총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다윗은 그것을 기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고, 그들에게 가치를 부여해 주는 삶을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드러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나를 존귀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자 찬양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가치를 부여해 준 사람입니다. 나는 주님이 사랑해 주시는 사람입니다. 나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 받은 사람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각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대하게 아낌없이 넘치도록 주시는 사랑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나아가,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대로, 주님께 갚을 길은 없지만,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 누군가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찬양하길 원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예전에는 이 찬양을 부르면서, “이 쓸데 없는 자”를 강조하면서 불렀습니다. 므비보셋이 불렀다면, 죽은 개 같은 자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구더기 같은 자’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나는 알 수 없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함께 찬양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