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손자 병법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인데요. 춘추시대 오나라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의 저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은 미국 군대에서도 가르친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얼마 전에 서점에서 영어로 쓰여진 손자병법 소개서를 보면서 신기해 했습니다.
손자병법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에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요약본이 있었습니다. 요약본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이 책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시계라고 하는 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손자가 말했다. 전쟁은 국가의 큰 일이다. 전쟁터는 병사의 생사가 달려 있는 곳이며, 나라의 존재와 멸망이 달려 있는 길이므로 세심히 살펴야 한다. 그래서 다섯가지 원칙과 일곱가지 계산으로 비교하여 피아의 상황을 정확히 탐색해야 한다. 첫째는 지도자의 능력, 둘째는 기상조건, 셋째는 지형조건, 넷째는 장군의 능력, 다섯째는 법제도라 한다.”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전쟁이 얼마나 복잡하고,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고려해야 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2.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계속되는 전쟁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백전백승하는 다윗의 모습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손자병법에서 언급하고 전쟁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쟁들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이나 조건들과 다윗이 치루고 있는 전쟁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전쟁들은 손자병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한 예를 이스라엘과 아멜렉의 전쟁을 들 수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길 승산이 없었던 전쟁입니다. 수 백년동안 노예생활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았을 리 없고, 또한 이들이 들고 다니는 무기도 변변히 않았습니다. 철로 된 무기는 여호수아만 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상대로 이겼습니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능력, 기상조건, 지형조건, 장군의 능력, 법제도’라는 원칙들이 갖춰야 하는데,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손자가 들으면 참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손자가 성경을 읽었다면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은 하나님을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또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 17:47)’
다윗에게도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 라는 믿음입니다. 이 부분을 오늘, 여러분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예전에 알고 있던 다윗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너무 잔인합니다. 그것도 수 만명의 사람들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죽이는 다윗의 모습에 당황하실 분도 있으실 겁니다. “어떻게 다윗이 저럴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이실 수도, 하나님도 너무 하시다는 반응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실재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정당화됩니다.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비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행여 자비를 베풀어서 적을 살려두면, 이 때문에 큰 고초를 당할 수 있는 곳이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니, 우리가 ‘전쟁’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고, 이 단어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어있는 곳이고, 은혜가 없는 곳이 전쟁터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이, 믿는 자들이 치루는 영적 전쟁의 현장도 이렇다 라는 점입니다. 이 전쟁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송태근 목사님의 책에서 이 부분을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다고 표현합니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내용은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우리 안에는‘자신만의 사고, 버릇, 가치관, 문화, 어둠의 세력 밑에서 즐겁게 지내던 것들에 대해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새롭게 시작되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아말렉, 블레셋, 모압과 같은 적군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적을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적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뿐 아니라, 우리 가족과 이웃들까지도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죄된 습성들을 진멸하기 까지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를 믿기 전보다 더 심한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 아닌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전쟁에서, 특히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할 필요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3.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다윗의 치뤘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던 비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삼하 7장에서,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님 앞에 꿇어 앉아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하나님, 내가 누구이며 또 집안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나를 이러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내가 누구인가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있게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잘난 것 하나 없고, 가진 것 하나도 없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센 척’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주님 앞에서 조차도 센 척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적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고, 내가 신앙 서적을 얼마나 많이 있고, 내가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내가 신앙 생활을 한 지가 몇 년이고, 내가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 있는 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우리를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적군이라는 사실을 또한 우리가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싸워야 할 적의 실체는 이런 것입니다.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와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악독한 것” 들입니다. 에베소서에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고 고백하고,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계속 말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는 여러분, ‘우셔도 됩니다’ 세상에서는 강한 척, 센 척 해야 될 때도 있지만, 주님 앞에 나오셨을 때는 아이처럼 우셔도 됩니다. ‘주님 저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는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울면서 기도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 앞에서 저도 상당히 센 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주님 앞에 무릎을 끓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눈물이 웃음으로, 여러분의 고난이 희락으로 변화되는 각별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4.
우리 안에 있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또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어서 입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4절과 11절에 나옵니다.
‘그에게서 기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다윗은 또 병거를 끄는 말 가운데서도 백 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다리의 힘줄을 끓어 버렸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말’입니다. 말이 힘을 상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수 백마리의 말 중에서 백 필만 남겼습니다. 꼭 필요한 숫자의 말만 남기고 나머지 말들은 쓸모가 없게 만든 것입니다.
11절. 다윗 왕은 이것들도 (은과 금과 놋으로 만든 물건)을 따로 구별하여서, 이미 정복한 모든 민족에게서 가져온 것에서 따로 구별하여 둔 은금과 함께 주님께 바쳤는데.
군대를 운영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몇 만명이 되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생활을 하기 위해 앞으로 필요한 돈까지 계산했다면, 다윗이 보관해야 되는 재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것들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손자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하겠다는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왜 다윗이 이런 이상한 행동을 했을까요? 전쟁을 위해 필요한 말의 다리를 끊어 버리고, 군대 운용비로 사용할 수 있는 은과 금을 주님 앞에 드린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손자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하기 위한 조건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이 그의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을 삶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천 마리가 넘는 말의 다리를 끓어버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불안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전쟁이 코 앞인데, 이렇게 까지 해야 되냐는 불만도 다윗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믿음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드린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또한 다윗이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절실히 깨달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더 의지한다고 말하면서, 그렇지 못할 수 있는 자신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하고,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권력과 돈을 더 의지합니다’
이게 저의 모습입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다고 고백하지만,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뒤 돌아가 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고, 돈과 권력을 의지하려는 모습으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냐 하면, 보이는 것들, 우리가 의지하기 쉬운 것들을 끊어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겠다고 결심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말은 어떤 것인가요? 여러분의 은과 금은 어떤 것인가요?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말의 다리의 힘줄을 끓어버리고, 전쟁을 통해 모인 군대 자금을 하나님께 받치는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헌금 많이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상들은 헌금 많이 하면 복을 준다고 뻥 치지만,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받으신 것은 그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말의 힘줄을 끓어버리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드리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를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는 믿음. 우리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처럼 보게 된 것이 6절과 14절에 나옵니다.
6절.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14절.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이 말씀이 여려분과 저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하고, 그것을 삶으로 주님께 보여드린 사람들에게 임하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허드슨 테일러라는 선교사님은 근대 선교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분은 중국에서 사역을 하셨는데요. 이 분의 선교 사역에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선교 본분에서 받은 편지 한 통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작정된 헌금이 모이지 않았으니, 귀국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교비를 더 이상 대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받아본 허드슨 테일러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은 꼴이니 그럴 수 밖에요. 저도 그런 편지를 예전 직장에서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이 노랗고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이 편지를 받고 허드슨 테일러는 고심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인 선교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선교비가 없어서 그만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아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문제를 간과할 수도 없는 암담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이럴 때가 우리 삶에 있습니다.
이 때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했던 일은 기도였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기도 뿐이었습니다. 연약함을 깨달은 존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서 허든슨 테일러의 머리에 두 개의 단어가 떠 올랐다고 합니다. 하나는 ‘에벤에셀’이고 하나는 ‘여호와 이레’라는 말입니다. ‘에벤에셀’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뜻이고, ‘여호와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릴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어떤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것이 확신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 단어를 붙잡았습니다. ‘에벤에셀’ ‘여호와 이레’
영적 전쟁에 필요한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양식이면서, 또한 우리의 검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이지 않나요. “주여 말씀하옵소서! 우리가 듣겠나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두 단어를 붙잡고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 동안 영국의 신사복을 입고, 영국에서 보내온 음식을 먹고, 영국산 구두를 신고 전도하던 것이 후회가 되면서 그 동안 호화스럽게 살았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했던 일은 중국사람의 옷을 입고, 중국 사람의 신을 신고, 중국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겠다는 결심을 했는데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입고, 먹고, 사셨던 것처럼, 허드슨 테일러도 중국 사람과 같이 입고, 먹고 마시게 된 것입니다. 미개한 나라 중국에 와서 선진 문물인 영국의 문화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과 또한 중국 사람들의 영혼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자신에게 있는 말의 다리의 힘줄을 끓고, 또한 그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 다윗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리자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승리입니다. 우리도 이 원리를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5.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영적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전쟁은 쉬엄 쉬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존재는 만만한 상대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우리의 힘으로는 어렴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다윗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세요” 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처럼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양식을 우리가 받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윗처럼 우리에게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제 안에서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내 손에 있는 칼과 창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위엄과 힘을 의지하지 않고, 돈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삶이 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디로가든지 여호와께서 승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맛보아야 하는 즐거움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승리는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고백에서 ‘주어’가 중요합니다. 내가 승리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쟁은 주님이 이미 승리하신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승리하게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일은 주님께 무릎을 끓고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센 척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힘들어요. 제 힘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거대한 폭풍이 불어요. 그래서 내 영혼이 위축되었었어요. 세상은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차 있어요.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이 땅에 나 혼자인 것 같아요.
그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마라 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주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세상 유혹 시험이 내가 몰려 올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