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들이 주일 예배 때마다 반복해서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는 이렇게 하라면서 알려주신 모범 기도문 같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주기도문이 너무 좋다며, 하루에 한 번, 또는 하루에도 수 십번씩 반복해서 암송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몰라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주님께 궁극적으로 드려야 할 기도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주문처럼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으면 왠지 기분이 좋지 않거나 허전한 것 같아, 주문 외우듯이 암송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주기도문이 주문이 안되려면, 기도문 안에 들어 있는 핵심 내용이 무엇이며, 주님의 뜻을 되 새김질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 요한이라는 분은 주기도문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 자신이 산상 수훈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겠다는 소망과 다짐을 재천명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분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주기도문 내용을 묵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살겠다는 소망과 다짐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욕심 부리지 않고 일용한 양식으로 족하며,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살기를 바라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용한 양식’은 우리에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하루의 식량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 식량으로는 사는데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수 십 년간 먹고 살 것이 있어야 조금 안심이 됩니다. 그래도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하면서 걱정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주기도문의 기도는 매일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은 욕심 부리지 않으면 살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이유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대화이고, 대화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 분은 하늘에 계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특정하신 이유는 뭘까요? 우리는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가르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다는 말은 맞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지만, 우리는 애써 하나님이 우리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잊고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우리가 하늘을 볼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하늘에는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세요. 누가 계시나요? 힘들고 지칠 때 고개를 숙이지 마시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지 말고 고개를 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개를 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하늘입니다. 그 곳에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께서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온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8-11)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늘을 볼 때마다 누군가를 떠 올렸을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남들은 들을 수 없는 메시지를 그들은 듣고 보았을 것입니다. 단지 하늘을 보았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니 땅을 보지 마시고, 고개를 떨구지 마시고, 하늘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 곳에 하나님 아버지가, 그 곳에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입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특권입니다. 이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 같은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제가 보는 한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구한말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중에 ‘최유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노예 출신입니다. 이 때 당시 노예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지요. 최유진의 부모님은 주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최유진은 주인에게 도망쳐, 신미양요 때,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수 십년이 흐른 후에 유진은 다시 조선에 돌아오게 됩니다.
드라마에서 제가 인상깊게 보았던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그를 보살펴 준 선교사의 모습입니다. 부모 잃은 아이, 노예 출신, 주인에게 잡히면 죽을 수 있는 아이, 거지가 된 고아, 이 아이에게 가난했던 한 선교사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뭐니? 최 유진입니다. 유진? 미국에도 그 이름이 있지. 넌 참 좋은 이름을 가졌구나. 유진은 고귀하고 위대한 자라는 뜻이란다’ 그리고 그를 양자로 삼아서 그를 길러 줍니다. 거지가 된 고아를 향해 선교사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고귀하고 위대한 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유진은 자기 이름처럼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 삼아 주셨다는 의미는, 선교사가 유진을 ‘고귀하고 위대한 자’라고 불러주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양자 삼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또한 그 하늘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늘을 볼 때마다 기억하세요. 우리 아버지가, 우리의 구주 되신 분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을 믿느니 자신을 믿고 살겠다고 말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을 삶을 보면 평안합니다. 그들에게는 골리앗과 같은 존재도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다윗을 괴롭혔던 사울 왕과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고, 무엇이든 마음 먹을대로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도는 스스로 삶을 개척할 줄 모르는 의지 박약한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어떤 분이 한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해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좋은 조건으로 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자신이 계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분은 철저한 무신론자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있었던 문제는 갓 태어난 아이가 지독한 아토피 증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도 못하는 아이가 가려움을 참지 못해서 자기 살을 쥐어 뜯으면서 잠도 못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갈기 갈기 찢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기도할 신이라도 있건만, 나는 지금껏 살면서 기도할 수 있는 신도 못 두었던가!’라고 말입니다.
어만 이라는 분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런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 삶이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나는 여기에 큰 감사를 드린다. 그 무엇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감사를 표현할 대상이 없다. 이것은 내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공허함, 즉 누군가에게 감사하기를 원하는 공허함이다. 내게는 이것을 채울 마땅한 방법이 없다’
무신론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 감사한 일이 있어도, 누군가에게 기도할 대상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불행한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도할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상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특권입니다. 여러분, 슬픈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골리앗과 같이 우리 삶 가운에 있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삼상 20:1)
다윗이 자신의 친구이자, 왕의 아들인 요나단에 한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선하게 대했지만, 이런 다윗을 오해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 때문에 속상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할 대상이 있습니다. 다윗이 기도했던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했던 그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셨으면 합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대개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 라고 말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대개는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수 이유, 우리가 우리 필요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우리를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용서 받고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