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얼굴 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간난아이입니다. 방긋 웃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얼굴 같습니다. 이런 천사가 더 천사 같을 때가 있어요. 새~근 새~근 잠을 잘 때입니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평안하게 잠든 아이의 모습은, 부모에게 천사의 얼굴 같습니다. 이 아이가 더 천사의 얼굴을 할 때가 있어요. 실컷 자고 일어났을 때 입니다. 평안하고, 해 맑은 얼굴이지요. 세상 걱정 없는 닮고 싶은 얼굴입니다.
이렇게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돌변할 때가 있어요. 배 고플 때입니다. 천사 같은 얼굴은 어느새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변합니다. 사실 아이만 그런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배 고프면, 천사의 얼굴은 사라지고, 불만과 짜증만 가득한 얼굴로 남습니다.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런 얼굴을 합니다. 인간이 참 단순합니다. 필요가 채워지면 짜증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다시 평온한 천사의 얼굴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게 보통 사람의 얼굴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얼굴은 매우 특별한 얼굴입니다.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알게 되면, 그의 얼굴이 특별하다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는 모함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합니다 .스데반을 앞에 세워 놓고 스데반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재판장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만 해도, 화가 나고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짜증이 납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들의 뻔뻔한 얼굴을 보면 분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당하는 사람 입장이 되어봐도,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 집니다. 얼굴색이 변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을까? 화가 났을텐데, 억울했을텐데, 한편으로 두려울 수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 눈에 천사의 얼굴로 보였다는 것이 제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굼금했습니다.
여러분은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여러분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으셨는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져야 할 얼굴, 그 얼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이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나도 저렇게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게 했던 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모든 크리스챤의 이상은 스데반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상을 가져보자는 겁니다.
이상은 높게. 꿈도 높게. 잡아야 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 밤에 배운 찬양이 있는데요. 그 찬양의 가사 중에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라고 하는 부분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얼마나 큰 이상입니다. 이렇게 큰 이상을 가져보는 것. 이런 꿈을 꾸고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도덕적 수준도 높습니다. 영적 수준은 더욱 높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군사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졸병이 아니라, 장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장교입니다. 장교에게 바라는 영적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스데반이라는 영적 장교가 보여준 수준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시시하게 대충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교처럼 멋지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얼굴이 스데반의 얼굴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과 저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2.
스데반의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 알기 위해서는, 스데반이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알게된 스데반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영적으로 말이지요.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도 어려운데 지혜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일곱 안수 집사 또는 장로로 선출되었던 사람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그는 백성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이것이 참 대단한 것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지만,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사람도 있어서 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있으신 분 중에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 사람들에게 칭찬은 받지만, 성령과 지혜는 충만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고, 백성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되었으면 소망이 생겼으면 합니다. 부러워하지 말고 , 우리도 그렇게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시고 알게 하시는 것은, 부러워만 하라고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니, 절망하라고 주신 말씀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수준을 좀 높여보자는 겁니다. 지금도 높은 거 알아요. 그런데 더 높여 보자는 겁니다. 주님을 닮기까지. 이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안수 집사 또는 장로가 된 그는 교회 행정에도 탁월했습니다 .안수 집사들이 선출되고 일하기 시작하자, 교회에 있었던 불만이 사라졌습니다. 이 뿐 아니라, 그는 사도처럼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고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 권능이 충만한 사람.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도처럼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병든자를 낫게 하는 권능을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그의 능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했으면 해요. 우리가 무엇을 사모하고 바라고 기도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얼굴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그는 말도 잘했습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살았던 사람들,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과 회당에서 논쟁했지만, 모두 이겼습니다. 그가 성령과 지혜로 말했기 때문에 그를 당할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하기, 지혜로 말하기.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야 하냐면, 우리는, “우리 욕심을 따라 말하기. 우리 죄성을 따라 말하기, 우리 지혜로 말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의 지혜로 어떻게 이기나요.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고 원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지혜가 유튜브에서 얻는 지혜가 아니길 바랍니다. 즉 세상에서 배운 지혜가 아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믿을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정보 홍수 시대에 살고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니면, 우리는 정보 홍수에 빠져 죽을 수도 있어서 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감당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스데반처럼, 성령으로 말하고, 지혜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여기에 설교도 잘했습니다. 제 평가가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의 평가입니다. 그의 설교는 베드로의 설교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 설교도 잘하는 사람. 그의 삶도 칭찬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스데반 집사의 모습은 ‘성령 충만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 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얼굴’과 같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닮은 사람, 스데반!
우리의 얼굴도 예수의 얼굴을 닮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수준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을 닮게 하옵소서!” “주님을 닮게 하옵소서!”
“주님의 얼굴이 내 얼굴에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과연 스데반과 같이 엉청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스데반과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꿈은 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큰 이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 수준에 도달하기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주님 나라의 장교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요. 스데반 집사는 어떤 면에서 초신자 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은지 얼마 안되는 초신자입니다. 초대 교회가 생긴지 얼마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초대 교회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초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은 견고했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단번에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져야 스데반 집사처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초신자도 스데반 집사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소망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연륜이 적어도 스데반 집사와 같은 분이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얼굴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리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오늘은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거울을 보시고, 너무 슬픈 얼굴이면 격려해 주세요. ‘너무 힘들어 하지마, 주님이 인도해 주시잖아!’ 너무 화가 난 얼굴이면, 위로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말입니다. 그런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요.
한 아이가 엄마에게 혼이 나고서 엄마에게 썼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5-6살 정도 된 것 같아요. 한글을 막 배워서 맞춤법도 엉터리고 글씨도 삐뚤 삐뚤합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 아이의 마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엄마, 사랑한다는 글자가 보입니다. 혼은 났지만 사는 방법을 터득한 겁니다. ㅎㅎ 그리고 이런 말도 적혀 있습니다. 엄마의 화난 얼굴이 너무 무섭다는 이야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서운 얼굴만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사랑스런 얼굴보다는 짜증스럽고 화가 난 얼굴을 우리 가족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내 얼굴은 어떨까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천사와 같은 얼굴’이길 바랍니다. 예수님 같은 얼굴이길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무척 곤란하고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말입니다.
에이브리함 링컨이 의회에서 연설할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 못마땅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요!’ 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이 매우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내가 만약 얼굴이 두 개 라면, 왜 하필, 이 중요한 자리에, 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링컨의 따뜻한 성품. 인격. 그리고 그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보여준 일화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스데반 집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잊지 않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함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스데반이 보여준 천사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하는 내용입니다.
3.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공회에 잡혀온 스데반이 당당함을 잊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게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거슬리는 사람들을 보며 분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스데반의 마음에는 그들을 불쌍한 마음이 더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그들을 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아마 들어보셨을텐데요. 다빈치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모델로 뽑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예수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피에트로 반디네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차례대로 그리다가 마지막에 배신의 인물인 가룟 유다를 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있을 때 로마 시장이 다빈치에게 사형수 중에서 가룟 유다의 모델을 뽑으면 어떨지 하고 아이디어를 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모델을 찾기 위해 감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만나 한 사람을 모델로 뽑아서, 다빈치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대 모델이 된 사형수가 다빈치에게 물었다고 합니다.“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다빈치가 의아해하자, 사형수가 자기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는 바로 ‘피에트로 반디네리’라는 사람입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피에트로가 악마의 얼굴을 가진 가룟유다의 모델도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외모는 내면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마음 속에 담겨진 것은 예수가 분명합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 우리 마음에 담겨진 것이 우리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여러분이 다 놀라시길 바랍니다. “어쩜, 이렇게 멋있지!” 라고 말입니다. ㅎㅎ 맞아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벌써 그러고 계신 분이 있다는 걸 말이지요. 우리 모두 수준을 높였으면 해요.
또한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인 이유는,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위기의 순간에도, 그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했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다고 한 기록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있게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빛납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천사의 얼굴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나서 사람들 얼굴을 보면 천사 같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 얼굴도 주님의 얼굴과 같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본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구름만 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그 구름 너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봤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땅만 쳐다보며 한숨짓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보이면 게임 끝입니다. 주님이 보이면 우리의 얼굴에 근심은 사라집니다. 주님이 보이면 우리의 얼굴은 해처럼 밝게 변합니다.
4.
스데반 집사 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천사의 얼굴’과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의 얼굴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 정의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가득찬 사람의 얼굴, 세상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이 얼굴 모두가 바로 천사와 같은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미지의 땅을 향해 가는 아브라함의 얼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왕의 진수 성찬을 거부하던 다니엘의 얼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 선두에 섰던 갈렙의 얼굴.
처녀의 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자 했던 마리아의 얼굴.
주님이 주신 사명을 다 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 달려갔던 사도 바울의 얼굴.
부패한 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종교 개혁을 한 마틴 루터의 얼굴.
하루라도 더 살게 되면, 오늘보다 좀 더 온전해 지고 싶어 했던 교회 오빠, 이관희 집사의 얼굴.
이들 모두의 얼굴도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제가 배운 찬양인데요.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라는 조금 긴 제목의 찬양입니다.
1.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2.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후렴: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찬양을 배우고 부르면서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나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어요. 세상 것 의지할 수 없어요. 그런니까, 나는 주님을 의지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후렴이 제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꿈. 그 꿈이 나의 꿈이 된다. 예수님의 성품. 그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된다.
이런 날이 있기를,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해야 겠다”라는 고백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스데반. 또한 수 많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믿음의 선조들. 그 대열에 여러분과 제도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