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40세가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는 말은,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미국 링컨 대통령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나이 40세이 넘어서 부터는 스스로 자기 얼굴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 나이가 넘으면, 원래 가지고 있던 외모와는 상관없이 내면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내면의 얼굴이라고 말은 마음 속의 생각인데요. 그것이 외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매일 불평하는 사람의 얼굴과 매일 감사하며 사는 사람의 얼굴은 같을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얼굴을 가지시길 원하세요? 저는 품위가 있는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을 때, 꼭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욕심꾸러기 얼굴이 아니라, 봤어도 또 보고 싶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스테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이 천사를 보지는 않았지만, 천사하는 떠 올리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천사 같다’ 선하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또한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닮고 싶은 얼굴이기도 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처럼 이곳에 모인 여러분도 천사의 얼굴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의 얼굴이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 같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를 잘 압니다. 우리의 얼굴이 천사와는 한참이나 멀다는 걸 말입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 얼굴 같았던 스데반 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은 있지만, 우리 얼굴은 천사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얼굴에는 우리의 걱정과 근심이 쓰여져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얼굴에는 우리 삶 속에 있는 들어 있는 수 많은 두려움이 쓰여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내일을 걱정하고,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입을 것을 걱정합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염려들이 우리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우리 얼굴에는 우리의 욕심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 얼굴에는 분노가 남아 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화가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이 우리의 내면의 얼굴이고, 그것이 우리의 외적인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얼굴을 우리는 천사와 같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얼굴을 가져야 할까요? 그 고민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얼굴에 자꾸만 생기는 주름살보다, 자꾸만 거칠어지는 피부보다, 우리가 가슴 아파야 하는 것은 우리의 얼굴에 나타난 우리 내면의 얼굴입니다.
그래서인지 스데반의 얼굴은 특별한 것입니다.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그의 내면에 있는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안에는 예수가 가득했습니다. 그 안에는 성령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그것이 8절의 내용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들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기적을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이 행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짧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교회 다닌 햇수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함께 일하심을 경험한 사람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요? 그 얼굴이 바로 천사의 얼굴입니다. 기쁨의 얼굴. 승리의 얼굴. 능력자의 얼굴인 것입니다.
9절과 10절을 읽어보면 스데반의 얼굴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의 내면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지혜가 충만한 사람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삶의 어려운 문제도 그것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척척 풀어내는 사람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요?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일 것입니다. 승리자의 얼굴과 능력자의 얼굴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얼굴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11절과 14절의 내용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어떤 내용이지요? 소위 지식인들이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패하자 비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스데반이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말합니다. 거짓 증인을 세웁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라고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이고,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모세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요? 또한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을 여러분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요?
불쌍히 여기는 얼굴일까요? 경멸하는 얼굴이었을까요? 분노로 가득한 얼굴이었을까요?
지금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스데반의 얼굴은 어떤 것이었나요? 15절을 보면,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자신을 죽이려고 애쓰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움도 없고, 걱정도 없고, 분노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스데반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오히려 놀랬을 것입니다.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도 근심하지 않는 얼굴, 불의한 일을 당해도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얼굴인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뭔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이잖아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천사의 얼굴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려고 논의했던 사람들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요? 천사의 얼굴과는 대조적인 얼굴이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스데반의 얼굴과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어떤 얼굴을 가지기 원하시나요? 스데반의 얼굴인가요? 종교 지도자들의 얼굴인가요? 당연히 스데반의 얼굴이기를 바랍니다.
또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이유는,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그가 항상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삶이 평안할 때만 예수 충만했고, 삶이 어려워도 예수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스데반의 얼굴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다빈치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모델로 뽑은 사람은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예수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피에트로 반디네리’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차례대로 그리다가 마지막에 배신의 인물인 가룟 유다를 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로마 시장이 사형수 중에서 모델을 뽑으라고 해서, 그 중에 모델을 찾아 그림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사형수가 다빈치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다빈치는 의아해하자, 사형수가 자기를 소개했다고 합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피에트로 반디네리’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던 피에트로가 악마의 얼굴을 한 가룟유다의 모델도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모는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 내면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에 따라 그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삶에는 수 많은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어떤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염려합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새겨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의 내용인 마태복음 6장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지요.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의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며 살겠다는 사람의 얼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 정의를 지키겠다는 결의에 찬 사람의 얼굴, 이 얼굴이 바로 천사와 같은 얼굴입니다.
우리도 얼굴한 번 바꿔 봅시다. 누구처럼요? 스데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서도, 하나님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처럼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 시간 스데반의 얼굴을 묵상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믿음을 우리도 본받게 하옵소서. 예수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했던 그의 삶 처럼 우리 삶 속에서 우리 내면에서 예수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한 삶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