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있었던 일인데요. 제가 다니던 이공 대학 입구에 ‘장승’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든, 어느 날 아침, 이 장승이 톱으로 싹둑 잘라져 넘어져 있었습니다. 이 일로 학교가 난리가 났습니다. 조상님들의 소중한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주장과 이런 우상을 학문의 전당에 있다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주장이 맞선 것입니다. 장승이 잘려진 모습에 대단히 화가 난 사람도 있었고, 시원하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학생회에서 돈을 모아서 그 전에 있던 것보다 더 큰 장승이 더 세웠습니다. 장승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일이였지만, 결과는 좀 엉뚱하게 끝나 버렸습니다.
이 일로 한동안 학생들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장승은 잘라 버려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내 버려둬도 괜찮을까요? 장승을 잘라버린 그 분은 용기 있는 행동을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무모한 일을 하신 것일까요?
오래 전 설문 조사라고 하는데요. 미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십계명의 1,2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십계명의 1,2계명은 방금 읽었던 본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80%가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이 드시나요?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십계명을 왜 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각각 나옵니다. 출애굽기20장에서 십계명은 주신 것은, 400년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광야 생활을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신명기 5장에서 언급된 십계명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광야 생활을 하든지, 가나안 땅에 살게 되든지 꼭 필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에 살든지 십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십계명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사람들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되는 말씀이 십계명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십계명을 들려 주신 시점은, 종의 신분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바뀐 후 입니다. 또한 광야 생활을 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이라는 새로운 곳에서 살게 될 시점입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들려주신 말씀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2024년을 시작하는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도 십계명인 것입니다.
이진희 목사님의 ‘가나안에 거하다’는 책을 보면, 광야와 가나안 땅의 차이가 뭔지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일부 내용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광야를 지날 때는 모으지 못한다고, 좋은 집에 살지 못한다고, 은금이 증식되지 않는다고, 양 떼가 번성하지 않는다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씨를 뿌리지 못한다고 원망하고 불평해서는 안된다. 광야에서는 장막에 머물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이슬 한 방울에도 감사해야 한다. 로뎀나무 그늘만 있어도 감사해야 한다. 광야에서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광야에서는 축복의 장맛비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슬 방울 같은 은혜에도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가나안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집과 창고를 크게 짓고 우물도 더 깊이 파고, 소와 양도 번식시키고 은금도 증식시키는 등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곳입니다”
광야와 가나안의 결정적인 차이를 아시겠지요?
광야는 떠 돌면서 사는 삶이고, 가나안 땅은 정착해서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할 때 해야 하는 기도가 있고, 가나안 땅에서 살 때 해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실 때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일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가나안에서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릴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광야에서는 텐트에서 살아야 하지만, 가나안에서는 집을 짓고 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가나안에서는 창고를 만들어서 식량을 저장해야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지만, 가나안은 사람의 힘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광야에서 살고 계시나요? 가나안에 살고 계시나요? 환경은 광야에 살고 있지만 가나안에 사는 것처럼 사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광야가 위험할까요? 아니면 가나안이 위험할까요?
신앙인에게는 가나안이 광야보다 더 위험한 곳입니다. 가나안은 믿음없이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다시 들려 주십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신 5:7,8)’
하나님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뭔가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부분이 신명기 6장에 가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정열적으로 사랑하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정열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열심히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열심이 생기고, 정열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열심히 정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질투한다는 말입니다. 왜 질투할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질투라는 말은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는 질투라는 말은 오염된 면이 있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순수하며 거룩한 의미로서의 질투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사랑해 달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읽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정열적으로. 전심으로, 온 맘을 다해.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광야에 사는 사람들보다,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이 접하게 될 문제가 더 큽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언가 있을 확률이 가나안에 살면, 광야보다 더 많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하나님만 바라 볼 수 있는데, 가나안에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많아집니다. 돈과 명예과 권력과 성공과 안정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정열적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혹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절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 앞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느꼈으면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 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 같이 못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사람들은 표가 납니다. 그렇지요? 어떻게 표가 날까요?
얼굴 빛이 다릅니다. 사랑 받으면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의 얼굴에서도 빛이 나시기를 바랍니다. 거울을 보시면서, 오늘도 이렇게 여러분에게 이야기 해 주시길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란다’ 그러니까, 너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보렴’이라고 말입니다.
3.
하나님을 정열적으로 사랑할 것을 결심한 이들에게 주시는 두 번째 계명은 이것입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우리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접하면서, 나는 이런 적이 없다고 자신 있어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위로 하늘에 있는 것, 아래로 땅에 있는 것, 땅 밑 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형상을 만들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청년의 얼굴이 어둡습니다. 이 청년이 가고 싶은 과는 조소과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반대하십니다. 이유인 즉, 조소과에 가게 되면, 십계명의 2계명에서 금지한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것들을 형상화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찬이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조소과는 우상을 만드는 학과인가요? 다시 앞에서 들려 드렸던 학교 앞 장승은 우상인가요?
이 질문들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조소과에서 만드는 조각 작품이나 학교 앞에 있는 장승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상이 되기도합니다. 언제일까요? 조각품이나 학교 앞 장승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우상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합니다.
십계명의 2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를 알아야 합니다. 우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자기를 위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두 가지 기둥을 알아야 합니다.
첫번째 기둥은 두려움이고, 두 번째 기둥은 욕망입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직장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돈을 잃어버린 것 같은 두려움, 건강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자녀들이 어떻게 될 것 같은 두려움, 건강이 나빠질 것 같은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해 보면, 우리는 공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없애려고, 자기를 위하여 만드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지니고 다니면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이 그랬습니다.
원래 놋뱀은 모세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인데, 그 당시 놋뱀을 쳐다 보면 살았습니다. 여기서 놋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림자이기도 했습니다 (요 3:14-16).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냐 하면, 사람들이 원래 의미는 잊어버리고, 놋뱀을 두려움을 이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열왕기하 18:4, 그가(히스기야가) 여러 산단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우상은 좋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상은 자기를 위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 욕망을 숨기기 위해서,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만드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이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책이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입니다. 책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우리가 사는 현대를 ‘우상이 점령한 사회’라고 부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섬기는 신들, 가나안 땅에 살던 민족들이 섬기던 신들을 우상이라고 부르지만, 지금도 그런 신을 섬긴다는 것이 팀 켈러 목사님의 말입니다. 책의 일부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프로디테 동상 앞에 무릎 꿇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이 외모와 몸매에 과도히 집착한 나머지 우울증과 각종 섭식 장애에 시달린다. 실제로 아르테미스에게 향을 피우지 않아도 돈과 성공을 세상 최고의 가치로 떠 받들면 우리도 자녀를 일종의 인신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많은 재물과 위신을 얻고자 가정과 공동체마저 팽개친다’
‘ .. 인간의 마음이 성공, 사랑, 재물의 자유, 가정 등 좋은 것을 긍극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우리 마음은 그런 것을 신격화해 삶의 중심에 둔다. 그것만 얻으면 존재감, 든든함, 안전과 충족감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무엇이든 우상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데서 얻으려 하면 그게 우상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의 2 계명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이야기가 9절에 나옵니다. ‘그것들(다른 신들, 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 구절을 읽으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있지만 미워한 적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도 사랑하고 우상도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우상도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네가 나를 미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전부 이거나 전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아무 것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아버지가 죄를 지었으면 아버지만 벌을 받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뿐 아니라 삼사대에게 죄 값을 치루게 하신다고 하니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가족 형태가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일인 가족도 많지만, 그 당시에는 삼 사대가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생기면,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면 그의 자녀들도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죄로 인해, 온 가족이 죄 값을 치루게 된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받아야 할 충격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10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천대’라는 의미는 ‘영원히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을 영원히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3절,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알고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귀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게 되면 많은 유혹들이 있겠지만,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여전히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감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은혜를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