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에 작은 밭이 있습니다. 가을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제가 좋아하는 무우를 밭에 심었습니다. 몇 년 묵은 무우씨라고 ‘싹이 날까?”하는 의심이 있기는 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파란 싹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말라버린 씨 같은데, 땅에 심고 물을 주고 얼마를 기다리니까 파란 싹이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새삼 신비로웠습니다. 땅 속에서 하늘을 향해 파란 얼굴을 내민 녀석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 죽게 생겼는데 살아나는 구나.. 만지면 부러질 것 같이 연약해도.. 큰 무우가 되겠지?’ 그리고 무우 싹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생명은 반드시 싹이 난다는 원리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땅에 심고 물만 주면 하나님의 생명 코드가 작동된다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아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생명 코드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연약해 보이기도 하고, 간혹, 금방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명 코드가 제대로 작동만 되면,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입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교회입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기에 연약하게 보이는 것 뿐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생명 코드가 심겨져 있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첫번째 메세지입니다.
교회 뒷 마당에 밤나무가 있습니다. 예전에 김창환 장로님 내외가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밤이 하나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료도 주고, 관심도 가져 주고, 사랑도 듬뿍 주었는데, 밤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했고, 쓸모없는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드디어 밤 두개가 열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밤나무 심은지, 5년도 넘었는데, 이제서야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코드가 들어 있는 식물은 언젠가는 열매를 맺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 마음 속에도 하나님의 생명 코드가 심겨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열매를 맺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싹이 나고, 결국 반드시 열매 맺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보여준 생명력입니다.
2. 하나님께로 났으면 산다
오늘 본문에서 가말리엘이 산헤드린에 모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35-3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난 일이면, 종교지도자들이 아무리 애써도 사도들이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 나지 않았다면 종교 지도자들이 애쓰지 않아도 망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여시면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막으시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반드시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잊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들 자신이었습니다.
33절의 반응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데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앞에 사도들이 한 말이 나오는데요. 30절을보면,’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마음에는 분노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행하는 일에 대한 질투 때문에, 자기의 위치가 불안해 질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인데, 사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위치와 명예과 권력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려는 일은 사도들이 죽이려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한다고 말했을 텐데, 실제로는 자신들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싶어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에 출애굽기 5장을 읽었습니다. 출애굽기 5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뜻이 더 중요한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왔을 때 무척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바로 왕을 만나고 난 이후에, 바로 왕이 화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심한 일을 시키게 됩니다.
어제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더 힘들고, 내일은 끔찍할 정도로 더 힘들어지는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와 반대로 고생길, 고통의 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면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나요? 자기 자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는지 생각해 보지 않고, 현실의 문제만을 보고 모세와 아론만 원망한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보다는 내 생각 먼저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반면 가말리엘과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항상 사람보다 하나님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가말리엘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던 가말리엘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런 고민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사용하셔서 사도들을 살리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많이 생각해 냈던 가말리엘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통해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생명, 그것이 살게 하는 비결은,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을 통해 이어져 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 삶이 고난이 닥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일을 통해 이루게 되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교회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면 멈출 수 없고, 하나님이 막으시면 아무도 문을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거든 또는 삶에 고난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 생각입니다. 자신의 욕심이나 경험, 욕망을 다 내려놓고, 항상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이신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장 먼저 하나님 생각을 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질문이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 질문이 우리 교회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할 것입니다.
찰스 M 쉘돈(1851-1946) 목사님이 쓰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기독교 고전이 있습니다. 원래 이 책은 찰스 목사님이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고 거리를 헤매는 동안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냉대와 무관심에 충격을 받은 후에 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을 일깨워져기 위해 쓴 소설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입니다.
우리도 이 질문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우리가 먼저 이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하는 질문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할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안하게도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온통 자기 주장과 자기 욕심과 자기 명예 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의 인생은 누군가를 죽이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반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생각했던 가말리엘의 삶은 누군가를 살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되면 일어나게 되는 일들입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했던 사람들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3 고난이 심하면 위로도 크다
가말리엘 덕분에 사도들은 죽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이스라엘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말리엘을 통해 사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의 삶은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고난이 심하고 능욕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41-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의 삶 속이 평탄대로가 아니라, 고생길입니다. 왜 이런 길을 가야하나요?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몸이 피곤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삶이 힘들고 고단한데,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고, 그들의 삶은 활기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저 같은 힘들어 지쳤다거나, 실망이 보통이 아니다 거니 하는 식의 반응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과는 달리 기뻐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린도 후서 1장에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사도들의 삶을 잘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의 삶에 고난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절망대신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고난보다 넘치는 위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 그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주시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그리고 그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원망의 소리보다, 어떤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또한 되기시를 바랍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위로를 받은 자는 아무리 큰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여러분게 제게 주시는 위로가 넘치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