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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지난 2천년간 수 많은 위기와 도전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그 위기와 도전을 통해 성장해 왔습니다. 우리 공동체는30년도 안되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위기와 도전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에게는 알지 못하는 위기와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들이 힘든 시간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위기와 도전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 아닌 것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인간적인 것들이 들어갈 때 생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위기와 도전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때가 우리 시선을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좋은 나침반이 되어 줍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의 삶이 녹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은 산상 수훈이라는 제목으로, 또는 팔복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지고 읽혀진 성경 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사모하는 ‘복’된 삶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 담겨 있어, 인기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자주 듣고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5장 1절을 통해 마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예수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어떤 이미지가 보이시나요? 선생님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 구절에서 마태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왕’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이 한결 같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미지 입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기에서도 나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강연을 할 때, 강연자는 ‘서서’ 말하고,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앉아 있는’ 모양새입니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있어야 앞에서 말하는 사람의 말도 제대로 들립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 보면, 현대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와 스피커도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가르쳐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면, 주변 소음도 적고 많은 사람이 움집해도 되는 열린 공간이 필요한데, 그곳이 바로 ‘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서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 ‘앉아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마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예수님의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왕은 서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왕은 앉아 있고, 신하들이 왕에게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어떻게 살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왕’의 모습으로 다가 오십니다.
주님은 앉아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서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교독문을 읽을 때, 서서 말씀을 읽는 배경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입니다. 이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도전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많은 도전이 있습니다. 그 위기와 도전은 다양합니다. 우리의 경험과 능력을 뛰어넘습니다. 그렇지만 그 위기와 도전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 앞서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왕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산에서 가르치신 교훈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절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태는 ‘무리’라는 사람과 ‘제자’라는 사람들로 구분해 두었습니다. 물론 둘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둘의 차이도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무리’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것 때문에 놀라고 신기해서, 한편으로 세상의 부와 치유를 받기 위해, 때로는 속 시원하게 세상을 꼬집는 말씀이 좋아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제자들 중에는, 세상 욕심 때문에, 초반에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태가 언급하고 있는 제자들은 결국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따르지 않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랐던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산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주 들어서 익숙해서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서 실천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예수님 가르침에는 많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도 부담스러운 내용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라 ‘아멘’하지만, 막상 그런 일을 당하면 멘탈이 흔들립니다. 의욕이 상실됩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 의를 위해 싸웠는데 돌아오는 것이 핍박이고,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예수님의 산상 수훈이 어려운 가르침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5장은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를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피해서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신 것처럼 무리들도 예수님을 보았고,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언급되는 산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높은 산은 아니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구릉지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사역 초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숫자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무리와 제자들 모두를 위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이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가 제자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더욱 더 예수님을 닮으라는 도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도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살라. 하나님을 위하여 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서 언급된 삶을 살아내려면, 반드시 필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우리에게 작동되면, 하나님 백성들에게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5장 13-16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밝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느니라. 이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말d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어쩌면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우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한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우리를 소금이라고, 우리를 빛이라고 불러 주는 날이 오게 된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단지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 되라고 주님이 먼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입을 열어 가르치신 첫번째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고 말씀 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언어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주님은 이 가르침을 주시면서 ‘복 있을진저’ Blessed 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어로는 ‘에제르’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야 너 참 복이 있어’, ‘네가 지금 생명으로 충만해!’라는 뜻과 같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 먼저야,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하시지 않고, 먼저 ‘복이 있어’라고 말씀해 주신 부분이 그랬습니다. 물론 예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미리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복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깜짝 놀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커진 눈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누가 복이 있다는 걸까요? 무엇이 복이 있다는 걸까요?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 라고 여겼습니다. 사는 것도 힘든데,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그렇다면 얼마나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을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쩌면 저주 받은 인생을 한탄하며 살았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저주하시는 분으로 다가올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길을 잃어 버렸을 때, 앞이 깜깜할 때, 사람들은 재수가 없다,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이 있다’. ‘소망을 강제적으로 박탈 당하는 것 같지만, 그로 인해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께 집중할 수 있으니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고 낙심이 찾아올 때,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주님은 우리를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하지 않고,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제르! 너는 복이 있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복이 있는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라는 주님의 격려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가족에게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너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 가족이 복이 있는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물질의 축복이나 이생의 영광이나 명예’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성품’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화평을 위해 기도하며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알려 주시면서, 복이 있는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것을 또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성품과 관련 있지만, 관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잘산다는 말은 부자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원래는 관계가 좋다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관계가 좋으면 잘 사는 것입니다. 부자면서 관계가 좋으면 잘 사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 자녀 관계, 직장에서 동료들과의 관계가 좋으면 잘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으면 더 잘 사는 것입니다.
성공한 인생은 ‘관계가 좋은 인생’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질까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잘 표현해 주는 시편이 이 구절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 42:1)’
삶이 힘들고 낙심이 될 때,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목마른 사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애절하게 찾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3.
미국의 게리 토마스 목사님이 어느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 가지 제안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데 함께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비행기 일정을 바꿔야 해서 800불 정도가 더 들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그는 일정을 바꾸었습니다. 세계적인 목사님을 만날 기회가 왔기 때문에, 생각해 보고 어쩌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하던 일정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게리 목사님이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 안에서 이런 음성이 올려 왔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그렇게 찾던 때가 언제냐?’ 세계적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힘을 다하는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으신가요?
이 질문에, 제게도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깨닫게 됩니다. ‘큰 일이구나’.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제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위기일까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위기일까요? 주님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면 건강한 것입니다.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흘러 갈 것입니다.
우리의 위기는 하나님을 찾는 목마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힘을 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찾는 목마름’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위기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위기이고 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은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가르치셨습니다. 둘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셋째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교회가 할 일도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가르치는 일이고, 둘째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셋째 치유와 회복의 일입니다.
근데, 우리 공동체는 어떨까요?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반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제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시편처럼,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 찾기에 분주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큐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영혼에 목마름을 해갈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실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또한 우리가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수 많은 위기와 도전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우리 삶에 위기와 도전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위기는 우리가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도전은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그렇지만, 그 위기와 도전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목소리에 집중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세상은 저주 받은 존재라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가 복이 있다’고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복되다 해 주신 주님이, 우리에게 마음이 가난해 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찾는데 갈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목 마른 사슴처럼 찾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게 먼저 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곳이 하늘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복을 누리며 사시길 바랍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예수 하나님의 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