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담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자기 눈만 가린다는 뜻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그냥 놔둔체,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그 때 그 때의 얄팍한 행동으로 대충 넘어가려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한 일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도 비슷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토지를 팔아서 그 돈 전부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겠다고 약속했지만, 자신을 위해 얼마를 감춰두었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이 일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꼴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통해 이들 부부의 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얼마를 감춘’이들에게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잠시 가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은 가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잘 잊어버리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런 행동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뭔가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필요없으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하나님은 계시며,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을 손바닥으로 자꾸 가리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죄악된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습 그대로입니다. 가식도 필요없어요. 가면도 필요없습니다. 그냥 우리 모습 그대로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족한 것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것 다 아십니다. 믿음 좋은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만나실 때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출 3장).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고집도, 우리의 욕심도, 우리의 가치관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부부의 결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정직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인생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직하게, 또한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입니다.
2. 회개할 수 있을 때 하라.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 얼마를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을 보면서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입니다. 바로 회개를 그들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 이 부부가 그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만약 그들이 회개했다면, 이 부분의 결말은 죽음이 아닌 다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도 오늘 본문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도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치려 갔다가 패배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일의 중심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친 후에, 그 곳에서 취한 물건을 하나님께 모두 바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자기 장막의 땅 밑에 ‘옷과 금과 은’을 몰래 숨겼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아간은 자신이 할 일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죄악은 금방 탄로가 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누군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비 뽑기를 통해 여호수아는 범인인 아간을 찾아냈습니다. 아간이 제비 뽑기를 통해 범인으로 지목 받기 전에, 그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간의 마음 속에는 ‘설마’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모르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것을 아간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마. 이러면서 말입니다.
그가 범죄함으로,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그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회개할 기회가 있었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 바로 알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납작하게 엎드려서 주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까지 힘들어집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도, 다른 사람까지 힘들어집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백성들을 항상 용서해 주십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번째 교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 1서 1:9)” 주님의 약속입니다.
3. 좋은 일을 할 때 기도하라.
엄밀하게 따져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려고 했던 일은 대단한 일입니다.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일은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 일은 좀 더 가지기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일이기에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를 돕기 위해 부부가 큰 희생을 각오한 셈인데, 문제는 그 결과가 비참하다는 점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일이라도,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긴 결과입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요? 좋은 일 하려고 할 때도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주님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약점을 사탄에게 공격당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끝까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할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론이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세번째 교훈입니다.
4. 부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얼마를 감춘 일’을 보면서 깨달을 수 있는 네 번째 교훈은 아내의 역할이 또는 남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땅을 팔고, 그것을 사도의 발 앞에 둘 때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이 의논하고, 같은 마음과 뜻이 되어서 한 일입니다. 새번역으로 2절 말씀을 읽어보면, 이들 부부가 헌금을 하는 과정 동안 의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부부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의논하는 것은 보기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그들이 사도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일까지도 같은 마음과 뜻을 가지고 있었던 점입니다.
남편과 아내 중 한 명이라도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이 잘 되려면 남편과 아내가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특히 한 쪽이 연약할 때, 다른 한 쪽이 그 연약함을 보충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잘못을 저지를 때 함께 박수 치는 아내가 아니라, 그 잘못을 교정해 줄 수 있는 아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내가 잘못 선택했을 때, 바르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남편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이 부분에서 실패 했습니다.
어떤 일을 의논해 가면서 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들은 엉뚱한 부분에서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우리의 가정이 행복해 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우리의 주인이 물질이 되지 않게 하라.
‘자기를 위해 얼마를 남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을 통해 배울 수 다섯번 째 교훈은 우리의 주인이 돈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사도 발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눈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은 동일한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이 ‘사도들 발’ 앞에 돈을 놓았다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물건인 돈보다 인격인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자로 잘 사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또한 바랍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참으로 매정하고, 비인격적입니다. 비인격적인 돈의 지배를 받아, 비인격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 가운데 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매일 보는 뉴스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돈이 주인이 되면, 사람들은 돈이 시키는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힘들게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돈이 되지 않게 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이 한 일이 지금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전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게 된 것이 헌금 안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가 3절과 4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헌금을 해도 그만 안해도 상관없었던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순간, 그들의 손이 그들의 눈을 가리면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해서 망한 것입니다. 돈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돈을 발 아래 두려고 노력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 한 쪽 구석에 ‘그래도’ 라는 빌미를 남긴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돈을 인격인 사람 밑에 두지 않고, 사람 위에 다 일부를 남겨 둔 것이 사탄에게 잡혀 먹히는 발단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내 인생을 지배하시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돈은 발 아래 둔다는 의미는 돈을 지배하면서 살겠다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인격의 지배를 받는 돈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되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비인격인 돈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일 뿐 아니라, 자신도 죽게 만든다는 것을 본문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은 가지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헌금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을 지배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힘들게 번 돈이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복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눠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돈을 부리면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나도 살고, 우리 이웃도 살고, 이 민족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사도의 발 아래 자기의 것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부는 남겨 두었습니다. 돈의 노예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 교회는 타락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헌금으로 보이는 목회자는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선교사들만 경험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온전히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읽고 있는데, 그가 중국 선교를 하면서 기도했던 일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필요를 채워 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을 붙잡고 그가 살았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신실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을 지배하며 살았던 허드슨 테일러의 고백이 또한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6.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어느 회사 입사 시험에 나온 문제라고 합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그 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는 이상형. 당신은 단 한 명만을 차에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시겠습니까? 선택한 후에 설명하세요.
당신은 죽어가는 할머니를 태우고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서 은혜를 갚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는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에 답한 200명의 사람 중에 한 명의 기막힌 답변을 써 내서 회사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의사 선생님께 자동차 키를 드리고 할머니를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가끔씩 우리는 제약을 포기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틀을 깨고 생각하면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부가 가지고 있는 틀은 어떤 것이었나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깨뜨려야 할 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그것이 깨뜨리면 우리의 삶에는 기대 이상의 무엇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