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인기있는 프로그램 중에 ‘윤식당’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2번째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본 후의 간증(?)을 들어보면, ‘힐링이 되었다’는 의견이 많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포멧은 매우 간단합니다. 외국의 경치 좋은 곳에서 조그마한 한국 식당을 열어 장사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멋진 배우들이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고, 음식을 서빙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윤식당에서 만들어 파는 음식은 한국인에게 별로 특별하지 않습니다. ‘비빔밥, 불고기, 호떡’ 이런 음식들입니다.
프로그램은 열심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처음 한국 음식을 대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음식이라는 낯선 음식을 먹으면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화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맛있다’라는 말입니다. 프로그램 내내 가장 많은 대사이기도 합니다. ‘맛있는데!! 너무 맛있다! 중국 음식이랑 다르네. 근데 참 특별하고 맛있네!’ 그리고 음식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은 그릇을 보여줍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한국 음식 맛있다’ 이 말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 말을 전혀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힐링이 되었다고 감사의 글을 남깁니다. 신기한 현상처럼 보입니다.
‘윤식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칭찬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배가 고파 있다는 것을 프로그램이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멋있어! 색깔이 예술인데! 또 먹고 싶다!’ 이런 말을 외국인의 입을 통해 들으면서 한국 사람들은 힐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프로그램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맛있어! 이 한 마디가 누군가를 격려하고 힘을 줄 수 있다면, 우리도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우리의 일상을 맛깔스럽게 해 주는 소금같은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칭찬,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사람들을 힘나게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서 4:6)”
이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에 맛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윤식당 이야기를 먼저 드린 이유는, 우리 삶에 격려가 되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하냐 하면,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조심하지 않아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 말을 잘해서 어려움도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실수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때 사랑이 작동하면 우리의 삶은 한결 수월해 집니다. 어떤 사랑이냐 하면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나라 전래 동화 중에 ‘꼬마 신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덟 살된 꼬마가 부모님의 뜻에 따라 10세 위의 색시를 맞아 장가를 갔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신랑은 새색에게 사탕 사줘라, 말타기 놀이 하자고 하면서 색시를 귀찮게 했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느 날, 색시에게 복수(?)를 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시부모님이 두 분다 외출을 하신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색시는 신랑을 지붕 위에 던져 버렸습니다. 옛날 한국 집은 지붕이 낮았지만, 꼬마 신랑은 색시에게 내려 달라고 악을 쓰고 때도 부러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 밖에 외출하신다던 부모님이 돌아오다가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랑 어머니가 “애야, 네가 왜 지붕 위에 있니?’라고 너무 놀래서 물었습니다.
꼬마 신랑이 뭐라고 했을까요? 꼬마 신랑이 사실대로 말하면 색시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꼬마 신랑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큰 호박 딸까, 작은 호박딸까?’ 그러자 시어머니가 ‘아무 거나 따 가지고 내려 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날밤 꼬마 신랑이 색시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오늘 내가 한 마디만 뻥긋했어도 너는 죽었을거야”라고 말입니다. 그 날부터 색시는 꼬마 신랑을 잘 모시며 살았다고 합니다. 왜요? 꼬마 신랑이 색시의 허물을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3.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따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깨달은 것은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수치심을 느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 안에 생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9,10)”
벌거벗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1)”
짧은 구절이지만 이 안에는 몇 가지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동물을 죽이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최초로 죽음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는데, 죄 없는 동물이 이들을 위해 죽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은 누군가의 피를 흘려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하나님이 직접 가죽옷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서 옷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스럽지 않았을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직접 옷을 만드셨습니다. 에덴 동산 밖에서 살아갈 그들을 걱정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옷을 입혀주셨다는 것이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옷을 만들어주시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옷을 던져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허물을 직접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부끄러움이 감추워졌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나 (갈 3:27)”
우리가 입은 가죽옷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직접 입혀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우리가 교회 식구들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4.
사람은 허물이 많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는 장점이 다른 사람에게는 허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죄나 잘못을 들추어내는 사람과 그것들을 덮어주고 감추어 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좋으세요? 저는 제 잘못을 덮어주고 감추어 주는 사람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흠 많은 죄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을 들추어내는 대화가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데, 다른 사람들 흉을 보면 신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에게 나쁜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고 곤란한 것은 제 순서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저도 누군가를 흉봐야 하는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이런 식의 대화는 그래서 난감합니다. 또한 마음이 허전해 집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요. 이제는 압니다. 이런 대화 속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구요? 성경을 보세요. 뭐라고 되어 있나요? 사랑은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감추는 것이고 덮어주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혹시 교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교회에 사랑이 식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른 곳에서 제가 없으면 저도 흉보는 대상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씁쓸합니다.
둘째. 자기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삶을 마음껏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어렵고 슬프고 즐겁고 기쁜 일들이 우리 삶에 계속 일어납니다. 그런 이들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어떤 믿음이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나의 약점과 연약함이 감추어질 것이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있는 대화입니다.
“험담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새게 하지만, 마음이 믿음직한 사람은 비밀을 지킨다 (새번역, 잠 11:13)”
사도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참는다는 표현은 보호한다.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을 지킵니까?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직접 지어 주셨고, 또한 직접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지어 직접 입혀주셨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주님이 우리 허물과 죄 때문에 피를 흘리시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한 주가, 평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