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면서 놀랐던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졸업식입니다. 아이들 졸업식에 참석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게 있는데요.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졸업하는 학생들 이름을 한 명씩 불러서 졸업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지루함이 한 번에 다 날아갑니다. 바로 내 아이의 이름이 불려질 때입니다.
사실 졸업식의 묘미는 아이의 이름이 불려질 때,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차츰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요. 졸업식에서 아이들 이름을 한 명씩 불러 주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공부하고 졸업하는 아이들을 한 명씩 격려하고 축하해 주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담긴 행사가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민수기는 백성들의 숫자를 세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성경책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나오는 숫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숫자라는 관점으로 보면, 다른 느낌,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마치 졸업식장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큰 숫자들이 나오지만, 하나님이 구원받은 백성들을 섬세하게 다루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머리털 숫자도 세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이 많아서, 또는 심심해서 머리털을 세신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을 세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 만큼 구원 받은 백성들, 하나님의 군대로 부른 이들에게 관심이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머리털을 세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관심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숫자는 팔천오백팔십입니다. 이 숫자는 레위 자손의 숫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팔천오백팔십은,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한 사람들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큰 숫자에 묻혀 버릴 수 있지만, 머리털을 세시는 하나님이 일일히 기억하시는 사람들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 숫자에 포함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의 숫자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이 ‘예배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이게 우리의 고백이고 찬양이라면, 우리도 팔천오백팔십명에 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레위 자손들에게 크게 두 가지를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삶의 중심인 회막에서 예배를 준비하는 일과, 이동을 해야 하는 경우에, 회막과 관련된 짐을 나르는 역할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민수기를 통해,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우리도 이 두 가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고 예배를 준비하는 일과 예배와 관련된 짐을 나눠 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팔천오백팔십명이 하는 일들은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일이라는 겁니다. 회막에서 봉사하고 짐을 나르는 일이 그렇습니다. 근데, 이 일을 하는 나이는 30세부터 50세까지 입니다. 이 나이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너무나도 평범한 일을 수 많은 사람들이 한다는 것이, 낭비하는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쓸모 없는 일을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브리티시 위클리’라는 잡지 편집자에게 한 독자가 ‘설교의 무용함’에 대한 관한 글을 기고했다고 합니다.
‘나는 30년 동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 30년 동안 나는 약 3,000편 정도의 설교를 들었지만 지금 기억나는 설교는 단 한 개도 없습니다. 내 생각에 목사들은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을 설교 준비에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교 준비에 사용하는 시간을 차라리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설교 무용론에 대한 글이 실리고 많은 찬반 댓글이 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논쟁을 잠재운 한 글이 올라왔습니다.
‘나는 아내와 30년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결혼 기간에 아내는 저를 위해 30,000끼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말 감동적이던 식사는 한 끼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믿다는 사실은 기억조차 할 수 없을만큼 당연한 듯이 받은 그 식사들이 나를 견디게 만들어 주는 힘을 공급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돕는 보조 역할과 짐을 드는 역할을 했던 팔천오백팔십명의 수고는,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같은 원리입니다. 팔천오백팔십명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사색 중에서).
그러므로, 매 주마다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실함으로 살아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일상이 있기에 우리는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특별한 인상이 남는 일은 아니지만, 그 일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팔천오백팔십은, 회막에서 봉사하는 일을, 하나님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배마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는 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3.
또는 팔천오백팔십이라는 숫자에서, 우리는 ‘함께의 정신’을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예배도 함께 준비했으면 합니다. 이제는 작년일이 되었는데요. 작년 성탄절 예배 때, 처치엣파크 교회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3개 국어로 통역을 하는 바람에 집중하기가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함께’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경험했던 시간입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 다른 역사를 가진 사람들,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었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온 나라와 민족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배워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그랬습니다. 공부를 해야 남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가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배울 점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설교를 듣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게임도 하고 싶고, 다른 재미 있는 일도 많을텐데, 한 시간을 오로지 참아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된 시점에서 보니까,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는 이 시간들을 통해 아이들도 뭔가를 느끼고 깨닫게 되었으면 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이 시간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가정에서 보았던 부모님의 모습과 예배를 드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함께함이 가져다 주는 유익함입니다.
그래서 팔천오백팔십명에게 예배를 준비하라고 하신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함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한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전 한국에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와서 자더라도 교회에서 자라고 하시면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에 가서, 정말 열심히 졸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수 있는 일인데, 생활 습관은 바꾸지 않고 (늦게 잠 자는 일), 새벽 기도회에만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편히 집에서 잠 자면 될 것을, 불편하게 교회에 잤던 일을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렇지만,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게 함께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우리 삶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기억 못해도 함께 한 사람들은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여러분이, 소중하고, 또한 감사합니다.
4.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 약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립니다.
일 주일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 시간의 예배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왜 일까요? 우리의 일 주일을 농축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낸 일 주일은 이 한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삶의 중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전에 아이들이 태권도 시합이 있어서 아틀란타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섯 시간 운전하고, 경기를 위해 호텔에서 하룻밤도 자야하는 일정입니다. 경기가 시작되면 바로 경기를 바로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경기하는 장면도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기를 해야 하는 아이들은 긴장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드디어 경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시작’이라는 심판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참으로 반갑습니다.
아이들이 잔뜩 긴장하면서 그 동안 배운 기술을 이용해 경기를 합니다. 경기 시간은 3분 남짓입니다. 이번 경기에서 이기면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만, 지면 짐 싸서 돌아와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허무한 일 같습니다. 고작 3분을 위해, 써야 하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고작 3분이지만, 3분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3분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입니다. 그 동안 훈련한 것들을 실제로 검증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했던 훈련의 정도가, 얼마나 최선이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드리고 싶냐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 주일 동안 살면서 준비한 모든 것을 실행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예배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시간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느냐가, 그 시간을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가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대한 준비도 해 보시고, 예배 준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 일도 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팔천오백팔십명이 얼마나 열심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 예배 시간인 셈입니다. 단 몇 분의 예배를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수고해야 드릴 수 있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콜린 스미스 목사는 교회에 대해 네 가지 왜곡된 이미지를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주유소 (영적으로 소진되었을 때 설교를 통해 연료를 공급받는 곳)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영화관(한 시간 정도 세상의 복잡한 일을 잊고 좋은 일만 생각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약국’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약을 얻는 곳)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마트와 같은 ‘소매점’ (가족을 위한 모든 영적인 것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생가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미지들은 결국 교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소비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콜린 스미스가 이를 경계하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도 이런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수기를 통해, 예배가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했으면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배를 준비하고 보조하는 레위 자손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불편함도 참아내야 했습니다. 지루할 수 있지만, 성실함으로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드릴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렇지만,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지친 영혼에 연료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 예배를 통해 우리의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약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예배를 통해 세상 일을 잊게 만드시고 좋은 일만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공동체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팔천오백 팔십. 예배를 준비한 사람의 숫자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서 준비된 예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해야 한다는 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십니다. 이해가 안되더라도 함께 하면 배우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짧은 예배는 우리의 삶이 농축되어져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우리 예배가 되기를 주님으로 기도하고, 또한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