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2016-2017년도 비전트리 학교 수업이 시작됩니다. 한글에서 운동까지 모두 12명의 선생님들이 수고해 주실 겁니다.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면서 선생님들도 긴장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오게 될지, 어떤 학기가 펼쳐질지 기대 되면서 한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고 두렵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부터는 새롭게 시작되는 일이 많아져서 더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절대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에 대한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그렇지만 용기라는 것이 결심한다고 생기는 것은 않습니다. ‘아자 나는 할 수 있어. 용기를 내’라고 소리를 쳐 보지만 그렇다고 쉽게 생기 용기는 아닌 것입니다. 높은 절벽 위에서 번지 점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묶고 있는 끈이 안전하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아래로 뛰어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들이 그 사람들을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용기가 어디서 생긴 것일까요? 용기는 확신에서 생깁니다. 다른 말로 믿음이 생겨야 용기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나를 묶고 있는 끈이 안전하며, 그래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나 보다 먼저 뛰어내렸던 수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용기도 생기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가 그를 지배하므로, 절망만 하다가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절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옛 소련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열차에 있는 냉동고를 청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수로 냉동고 문이 닫혀 버렸습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너무나도 놀란 그 사람은 소리를 지르면서 문을 두드리면서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아무로 그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그는 냉동고 안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냉동고는 이미 오래 전에 고장 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냉동고 안에는 충분한 공기가 있었고, 실내 온도도 13도씨로 그렇게 춥지 않은 온도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그가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한 가지 입니다. 그가 냉동고 안에서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절망은 매우 무서운 질병이기도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환경에서도 최악의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 절망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재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쳤다는 죄를 심문하는 자리입니다. 이 재판으로 베드로와 요한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오히려 대담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보던 공회원들이 오히려 놀라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 놀랐던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그들이 본래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이고, 두번째는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무식하기 그지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게 되자 스승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치기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무식하고 겁쟁이 제자들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는 모습을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대담함은 그들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했던 답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19절을 보시면,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옳고 그른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크리스챤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옳은 일이어도 내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익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현대의 크리스챤들이 회복해야할 부분입니다. 내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은 일을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20절입니다.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진실만을 말할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진리를 말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증거들을 말하지 말라는 부분은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권력 앞에서, 특히 자신들을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말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용기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런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먼저 그들의 학문과 지식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가진 것이 그들을 용기 있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베드로와 요한은 세상적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자랑은 금과 은이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에서 생기는 용기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용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옳고 견고한 지식입니다. 안전한 로프인 것입니다. 무식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세상 권력자 앞에서 심문 받는 일은 두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용기를 가지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의 용기는 주님의 말씀이 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8-20절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 안에는 크고 작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의 두려움 부터 세상 권력자 앞에서 진리를 담대히 이야기 해야 할 때의 두려움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당황하기 쉬운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말씀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 우리에게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확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용기인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용기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두려움은 절망으로 바꿔 버리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아시나요?
하나님이 주신 땅,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보면서 그들이 절망했습니다. 자신들과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을 비교하면서 환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땅 거민은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 인은 해변가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28-33)’.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용기를 잃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절망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확신보다는 자신의 환경을 보고 자신의 감각을 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스스로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확신이 들어야 생기는 것이 용기입니다.
용기는 성령을 통해 생기는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용기는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용기는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용기는 옳은 것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현실이 되어 버린 명백한 증거입니다. 앉은뱅이가 예수의 일어난 사건처럼 우리에게 현실이 버린 사실이 우리에게 있어야 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한 일이 현실이 되어버린 그런 증거가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삶 안에 있어야 겠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탕이 된 용기는 바위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겠습니다. 골리앗과 담대하게 싸웠던 다윗의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용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이 땅을 사는 사람에게는 승리 뿐입니다. 현실이 되어 버린 주님의 역사하심 앞에서, 사람들은 할 말을 잃을 뿐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로 논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은 용기를 생기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우리의 어떤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용기입니다. 대담함입니다. 옳은 일을 하려는 용기가 생깁니다. 진리를 지키려는 용기가 생깁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싸울 힘이 생깁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문제들도 주님이 주신 담대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나서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약속을 붙잡고 용기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배운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다 배운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예수의 마음을 자신들도 모르게 닮아갔던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라.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같은 격려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도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용기로 이 땅을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악한 세상과 싸워 이길 용기가 절대로 필요한 세대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과 제 마음 가운데 심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