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학기말이 되면 긴장을 하는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동안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던 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연을 들려줍니다. 참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책을 구하지 못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가셔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사람,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젋은 청춘들의 외침들 속에는 외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잘 될 것 같은데 그게 잘 안되어서 안타까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들 중에는 자기의 사연과 함께, 어떻게 하면 선생이 학생에게 학점을 잘 줄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너스 점수를 더 주는 경우도 있고, 그것도 안되면 나중에 보충 수업을 하겠다는 학생도 있습니다. 학장의 힘을 빌려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총장의 힘을 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젊은 청춘의 외침이 참으로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해 보지만, 달리 방법이l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게 이런 말만 반복해서 할 뿐입니다.
‘미리 열심히 좀 하지? 미리 보충 수업을 하지? 제 때 숙제라도 내지?’
그리고 정중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사정은 정말 안됐지만, 지금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학생들의 외침과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면서 제가 누군가에게는 별로인, 또는 나쁜 선생으로 기억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나 욕을 하고 있을까? 얼마나 싫을까? 하는 생각에 또 성적표를 뒤적거립니다. 인생의 폭풍 속에서 울부짖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공평과 정의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곤 합니다.
2.
올해 12월은, 공동체가 욥기서를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욥기서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저는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혼동스러웠습니다. 고통당하는 욥이 생각하는 정의와 고통을 지켜보는 욥의 친구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씩 분석해 보면, 다 맞고 옳은 이야기들인데, 그렇다고 옳다고 박수를 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책이 욥기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욥과 그의 친구드링 말하는 정의는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정의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좋으신 이유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도우시는 분이기 때문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의 폭풍 질문에 침묵하시거나,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할 때 우리는 불공평하다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시편 23편이 떠 올랐습니다. ‘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이렇게 고백할까요? 2절에서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이래서 우리는 주님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4절에 가면 마치 욥기서를 읽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이 이야기는 다른 말로 하면, 목자되신 주님이 양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리고 갔다는 말이 됩니다. 음침한 곳, 두려움이 가득한 곳,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골짜기라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이 양들을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욥기서에 나오는 욥의 삶으로 바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신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니면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나를 인도하는 하나님에게, 우리는 폭풍같은 질문으로 하나님께 돌진하지는 않았나 하는 겁니다. 인생의 폭풍 속에서, 욥이 하나님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힘듭니다. 하나님, 이렇게 억울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폭풍처럼 욥이 하나님께 외쳤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침 햇살의 아름다움과 저녁 노을의 신비로움이 깊어질수록, 욥은 하나님의 침묵에 화가 많이 난 듯 합니다. 욥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속히 임하시고, 속히 대답하옵소서. 오셔서 나의 억울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죄 없다고 판결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바램이 욥에게 있었고, 이것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욥의 최후 변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은, 욥이 그렇게도 기다렸던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욥기서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의 등장도 기다려지지만 하나님이 욥에게 하시는 말씀은 내용도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인간이 아무 이유 없이 겪게 되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3.
욥이 기대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등장은 강력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폭풍우에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에,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이 기억났습니다. 폭풍 속에서 마이키를 잡고 날씨를 예보하는 기상 캐스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도 어렵지만, 바람이 거세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센 바람을 뚫고 하나님의 말씀이 욥에게 들린 것입니다. 거센 폭풍같이 하나님을 몰아붙이던 욥보다, 더 강력한 바람으로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신 것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런 장면이 나오면 상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어떤 목소리였을까? 폭풍우에서도 어떻게 하면 뚜렷하게 들릴까? 근엄한 목소리 였을까요? 아니면 엘리야 선지자에게 말씀해 주시던 그런 세미한 소리였을까요? 아마도, 저는 근엄한 목소리가 아니였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 이유는 2-3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욥이기도 하고, 욥의 친구였기도 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똑똑하고, 지혜롭고 언변도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무지한 말을 하는 자, 그래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묻는 말에 대답할 자세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자세를 바로 잡고, 하나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할 것을 주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은 욥에게 폭풍같은 질문을 쏟아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폭풍 같은 질문에 욥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욥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천지 창조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어떻게 설계하셨는지 욥은 알지 못했습니다. 욥은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욥은 사망과 음부와 지옥의 세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심판과 지옥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가는 길도 욥은 몰랐습니다. 사람이 없는 땅, 인기척이 없는 광야에 하나님이 왜 비를 내리시는 욥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던지셨던 질문들은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우리의 수준도 욥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욥은 고통의 문제와 정의 문제로, 하나님께 폭풍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이야기들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대답해 주셔도 실상은 욥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무지하고, 우리도 모르는 게 참 많습니다. 우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하지만, 설명해 줘도 알 수 없는 문제가 바로 고통과 고난의 문제인 것입니다. 욥이 당한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욥이 정금과 같이 순결해 지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욥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욥기 38장에서 40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권지성 목사가 특강 욥기 라는 책에서 정리한 내용을 좀 더 짧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대한 명확한 설계도가 있으십니다.
둘째, 오직 여호와 만이 창조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으십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이것을 알려주고자 한 질문들입니다.
셋째, 여호와께서는 만물의 관리와 유지를 결정하는 자유와 권리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물과 바다에 한계를 정하시고 통제하십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의 운영 원리로 세밀한 부분까지 지식을 갖고 통제하고 간섭하십니다.
다섯째, 세상의 운영 원리는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각양각색입니다. 하나님이 사자와 까마귀를 먹이시는 방식은 각각 다릅니다. 타조에게 어리석음을 주시고, 매와 독수리에게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시는 방식과 서식지를 만드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사자와 독수리의 살육처럼 야생 동물들의 세계는 인간의 정의의 잣대로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여섯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은 인간이 염려하는 바와 같은 커다란 모순과 무질서가 없습니다. 완벽한 세상입니다. 어디에도 오류가 없기 때문에 애써 바로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일곱째, 피조 세계는 창조주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기쁨의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니 욥이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니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상황 속에서 온전한 주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 보라는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하늘을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내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와 사랑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누군가에게 정의롭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나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모든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지도 않습니다. 신문을 들어야 보고, 뉴스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세상은 점점 나빠집니다. 엔트로피 법칙은 세상이 점점 더 무질서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편 23편.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왜 일까요? 내가 아는 지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것을 우리가 깨달았으면 합니다.
무지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면,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잘난체 하기 바쁜 우리고, 자신이 세사의 중심이고, 정의롭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그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무지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길 바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