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21-22
1
요즘 자주 듣고 있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혹시 안 들어보신 분들을 위해, 예배 후에, 유튜브 링크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찬양곡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이,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러니까 1944년 성탄절을 즈음에 감옥에서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이게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편지에 곡을 붙여 만들어진 찬양곡이 ‘선한 능력으로’라는 노래입니다. 이 찬양곡의 가사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본 회퍼 목사님은 반 나치 운동으로 대항하다 히틀러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투옥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계 대전 종전을 한 달여 앞둔 4월 9일, 39세에 교수형으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이 노래를 다시 들어보면, 그가 신앙인으로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보다도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그는 의연하고, 거룩하게,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고백한 것처럼, 죽음 앞에서도 놀라운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그를 감싸고 있는 선한 힘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선한 능력으로 감싸여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죽음 앞에서 놀라운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하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본 회퍼 목사님의 편지는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성령이 내려오시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저에게 예술가의 영감이 있었다면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장면입니다. 하지만 예술가의 소실이 없는 제가 영감이 있는 그림은 그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감을 주는 구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눈을 감고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나름대로 그려본 장면입니다.
2.
수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무리 속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요단강 동쪽까지는 직선 거리로 120킬로미터입니다. 그 길을 걸어서 오셨겠지요. 세례 요한을 만나기 위해 걸어온 시간에 비하면,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떨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 짧은 만남을 위해 예수님이 30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옛 생각에 잠겼을 것 같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살아온 힘든 세월들을 요단강에 씻겨 보내는 시간도 가졌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다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옛날 옛적에 요단강에서 있었던 일도 떠 올려 봤을 것입니다. 그 일은 여호수아에 나오는 역사입니다.
여호수아서 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살다가, 요단강 근처에 도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강만 건너면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요단강에 도착했다는 감격으로, 그 순간만큼은 달콤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 3:15). 이것은 수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과 셀수 도 없이 많은 가축들이, 수영해서 건너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건너가야 할 요단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라 불리는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수 3:5).
왜냐하면 앞으로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나타난 순간이, 하나님이 일하실 때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성결케 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여호수아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합니다.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들어서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 지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그 내용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에 닿으면 물이 끊어지고 쌓이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하실테니, 너희가 할 일은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선한 능력에 감싸여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요구했던 내용은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과 만나,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가 든 언약궤를 들고 요단 물에 그들의 발바닥을 닿게 하는 것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려운 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발이 물에 닿게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너무 쉬워서 순종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바닥이 강물에 닿으면 물이 마를까? 라고 의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경험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짓을 수 있습니다. 또는 너무 쉬운 일을 시킨다고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 까짓 일을 하라고, 제사장들이 동원되어야 하냐는 생각이 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무나 쉬운데, 너무 어려운 일처럼 되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순종은 자기를 버리는 일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넘실거리는 요단 강물을 보면서 발을 디디려면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의 경험도 의지하면 안됩니다. 자기의 실력도 내려놔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제사장들을 통해, 성경은 엄청난 일이 일어났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요단 강이 열렸습니다. 요단 강물이 말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가축들이, 마른 요단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갈 수 있었습니다. 순종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요? 선한 능력이 그들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놀라운 평화를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의 발이, 쉴 곳, 마른 땅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쉴 곳은 바로 마른 땅입니다. 이런 역사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곳이 요단 강입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예수께서 서 계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셨던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이제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새롭게 쓰여진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이 만한 장소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역사를 묵상하고 있을 때, 어느 새 자신이 세례를 받을 차례가 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례 요한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세례 베푸는 것을 멈춥니다. 아니 세례를 거부합니다. 예수님도 깜짝 놀랄 만한 일입니다. 요한이 세례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알아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이신 예수께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요한이 말려 가라사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4).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주셔야 하는데, 반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두 사람은 아주 어릴 적에 만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안 후에, 3 개월이나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면서 생활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한이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면서, 그 이후로는 광야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친척지간이라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못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도 조카들이 여럿 있는데 누군지 모릅니다.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라면서 얼굴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아봤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요한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신발을 푸는 일은 노예가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께 자신이 종보다 못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허락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 3:15)’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시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기의 모든 영광을 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순종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를 부인할 때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려놓고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 순간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세례(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요단강 물 속에 예수께서 잠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입니다. 순종하시는 예수를 하늘이 반기듯 열렸습니다. 어둠이 밝음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강물로 넘실거리는 요단 강이 열리며 마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자적으로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면서 밝은 빛이 예수를 감싸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본 사람은 예수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희망을 품어 봅니다. 막혀 있던 하늘이 신비롭게 열리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감았던 눈을 뜨고 하늘을 한 번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보셨던 그 영광스런 장면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가 사는 시대는 깜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신비는, 열린 새 하늘 사이로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 예수께 내려 앉으신 것입니다. 제 눈에는, 이 장면이 선한 능력으로 성령이 예수를 감싸는 장면으로 그려졌습니다.
3.
그런데 제 마음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여러분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많고 많은 동물 중에 하필이면 비둘기일까 하는 질문일 겁니다.
독수리 같은 성령, 매 같은 성령이 아니라 연약하기 짝이 없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께 임했을까요?
물론 성경에서 비둘기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올림픽 경기 때마다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비둘기를 날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에게,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둘기는 천덕꾸러기입니다. 비둘기가 왜 평화를 상징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니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인 된 것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 주장이 아니고, 성경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과 하늘에 숨 쉬는 모든 생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만 살아남은 생명체는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들과 동물들 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주는 오랜 순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방주를 타면 살고, 못 타면 죽습니다.
하나님의 물 심판이 끝난 후에, 노아는 물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노아가 처음 한 일이 있는데, 까마귀를 날려 보는 것이었습니다. 노아가 동물을 이용해서 한 최초의 생물 실험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까마귀를 통해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까마귀가 땅이 마르기까지 왕래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두 번째로 실험에 사용한 동물이 ‘비둘기’입니다.
노아는 세 번에 걸쳐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첫번째 비둘기를 날렸을 때는,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물이 아직 안 말랐기 때문입니다. 비둘기의 작은 발도 쉴 만한 곳이 세상에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쉴 곳,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지은 방주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로 돌아오는 비둘기를 손을 내밀어 맞이해 주고 방주 안으로 들입니다. 비둘기가 쉴 곳을 노아가 제공해 준 것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 일이 아닐까요? 발바닥을 붙일 곳이 없어, 헤메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손 내밀어서 하나님의 방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발바닥이 쉴 수 있는 곳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두 번째 비둘기를 칠일 후에 다시 날리는데, 이번에는 어린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옵니다. 땅에 물이 줄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삶의 시작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려준 메신저 역할을 비둘기가 잘 해낸 것입니다. 비둘기는 이 일로,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일 주일 후에 세번째 비둘기를 날립니다. 그런데 이 날 날린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른 땅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 노아는 방주 뚜껑을 열고 땅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합니다.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 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창 8:13)’
물이 말랐다는 것은, 이제 방주에서 내려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노아가 물이 걷힌 것을 안 날은 노아 601년 1월 1일이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넌 것도 정월이었습니다 (수 4:19). 창일하는 물을 이기고 마른 땅으로 올라온 날들이 모두 정월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2021년 1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꿈꿔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1월도 구원을 경험하는 희망찬 달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내년 1월도 그런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하기는, 코비드가 창일한 물 같지만 마른 땅이 되게 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해 보는 그런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비둘기를 날리며, 하나님의 때를 살폈던 노아처럼, 우리도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때 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안전한 곳에 머무는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날려보낸 비둘기가 어린 감람나무 잎을 물고 나타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을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신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비둘기를 통해 배운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얻게 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신다는 것을 우리도 이 어려운 시기를 통해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4.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면서, 또한 주님이 성령의 쉴 곳이 되심을 보게 됩니다. 비둘기의 작은 발바닥이 쉴 곳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러면서 성령으로 능력에 감싸이고, 놀라운 평화를 누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고난의 십자가, 멸시 받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구세주에게 임하게 된 놀라운 평화는 그의 공생애 내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평화는 요단강에서 시작해서 골고다 언덕에까지 이어진 평화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누리신 놀라운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능력으로 감싸신 성령 하나님이 주신 평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앞서 소개해 드렸던 본회퍼 목사님이 누렸을 평화입니다. 또한 예수의 평화는 초대 교회에서 최초로 순교한 스데반 집사님이 누렸을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을 때도 누렸을 평화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선한 능력이, 예수님처럼, 감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힘이 그들 안에 놀라운 평화로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평화,
성령의 능력으로 받은 평화,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며 주시는 평화,
그 평화를 우리 모두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모두가 사모했으면 합니다.
그 선한 힘이 우리를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첫 걸음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물에 내디딘 첫 발 걸음 같습니다. 거룩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스스로 성결케 하시고, 순종의 자리에 서시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아들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눅 3:22)’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시는 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부분을 묵상하면 할수록 참으로 신비합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이 모두 한 공간과 같은 시간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신비로운 방법으로 등장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함께 열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선한 능력이신 성령에 감싸이고 놀라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여시는 성자의 발걸음을 축복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신비한 것입니다.
5.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은 막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둡기만 합니다. 온 땅이 물에 잠기듯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온 땅이 혼동스러울 때, 하나님의 신은 그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노아가 마른 땅을 기다리며 비둘기를 날렸던 것처럼, 우리도 희망을 꿈꿔야 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요단 물을 디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의 자리에 내려 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며 순종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열립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 역사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힘이 우리를 감싸 주시는 것입니다. 선한 능력이 우리를 감싸 주시는 것입니다. 살리는 능력이, 회복하시는 능력이, 우리를 감싸는 것입니다.
이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시대에 열릴 때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러분의 삶이 선한 능력으로 감싸이고 놀라운 평화를 누리시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쓰시는 역사의 발걸음에,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루 또 하루가 새롭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 회퍼 목사님의 고백처럼, ‘ ..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우리도 주님 앞에서 이런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