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하는 어린이 페스티발에 다녀왔습니다. 약 1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내일 부터 한국문화 캠프를 시작하니까, 제가 주목해서 보게 되는 것이 있더라구요. 캠프는 어떻게 진행하는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요.제가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실 겁니다.
어린이 페스티발의 주제 성경은 사무엘상 3:10절 내용이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께 대답하는 말씀입니다. ‘..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님의 말씀이 희귀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린 나이의 사무엘의 모습이 진지하게 느껴 졌습니다. 캠프에서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저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진지하게 대답했는지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안에 어린 사무엘과 같이 반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2. 교회란?
사도행전 2장을 통해 교회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만드신 공동체 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자신의 신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만큼 주님이 교회 공동체를 귀히 여기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주님이 세우신 첫번째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이런 질문을 생각해 봤더랬습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건강한 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안에 생긴 기도제목이 바로 이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 공동체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넘치게 되기를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우리의 모습을 자주 돌아봤으면 합니다.
3. 주목하여 보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하는 관점으로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공동체가 하시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웃을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일이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본 일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의 시선 뿐 아니라 다른 시선들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서 보는 장면과 나중에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목해서 보는 대상도 마음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주목해서 봐야 할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3.1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하여 본 것.
오늘 본문이 일어난 장소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예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삶이 시작되는 공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장소가 성전입니다. 당연히 성전에서 선포되었을 말씀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세지 였을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서 선포되는 메세지와 삶의 현장 사이에 있는 상당한 거리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전혀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현장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앉은뱅이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느냐는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은 오늘 본문을 닮은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의 모습. 나약하고 소망없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메세지는 이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권능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 힘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소망없이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을 주목해서 보는 일입니다. 성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취해서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 눈에 보이게 시작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없는 자, 고통 받는 자들을 지켜 보십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된다 (마 11:5)’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임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들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요한이 가지고 있는 눈이 있느냐는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2. 앉은뱅이의 시선.
오늘 본문의 나오는 앉은뱅이의 시선은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을 보라고 하자 앉은뱅이의 반응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당연한 반응입니다. 이것이 또한 그가 사람들을 보는 시선입니다. “무엇을 얻을까” 해서 바라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인지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의 삶에 자라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던 한 사람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아닌가요?
C.S. Lewis루이스가 했던 풍자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날 푸쉬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의기양양하게 런던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푸쉬야, 너 지금 어디를 갔다오니?’
“예, 저는 영국의 여왕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푸쉬야, 그럼 너는 런던에 가서 무엇을 보았니?”
“저는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
왕궁에 얼마나 볼 것이 참 많은데, 고양이가 진작 본 것은 쥐만 보고 온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성전까지는 왔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을 오로지 자신에게 구걸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 우리가 관심있어 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많은 것을 보여주시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푸쉬 고양이처럼 쥐만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주목해서 보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 상태입니다.
3.3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여 볼 때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자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사람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시선에 괜찮히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자신에게는 이런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통해서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그 사람의 권능과 경건이 크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수련을 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경건으로 하나님께 권능을 받았다고 여기는 경우입니다.그래서 나의 경건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었는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사라지고, 자신의 이름만 남아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처음 성전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강하고 부유하게 하셨습니다.하나님이 그에게 큰 권능을 주었습니다. 그가 성전을 지을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그러나 그가 했던 일은 힘없는 백성들을 노예처럼 만들어서 성전을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노예로 해방시켜서 자유케 하셨는데. 솔로몬은 그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솔로몬 왕은 애굽의 왕 같이 변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잘못 사용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를 잘못 사용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과 재능과 부를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게 되면 성전과 같은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노예로 성전을 짓게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솔로몬을 주목했을 때, 그가 잊지 말아야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와 권력과 지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잘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경건해서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풍성케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메세지가 여기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할 때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깁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서 보게 못하게 하고, 대신 하나님을 주목해서 보게 그들을 이끕니다.
1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우리는 즐기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가진 권능과 재능이 우리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가지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권능의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시 147:10,11)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도다.
여러분들, 그리고 저에게도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완전히 바뀌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마음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