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에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장소’를 선정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제목만 봐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말을 보면서, ‘경치가 좋은 곳인가? 범죄가 없는 곳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멤피스?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잡지에 선정된 살기 좋은 마을 중에는, 저희들이 잘 아는 동네가 한 군데 소개되어 있어서 제가 깜짝 놀랐는데요. 어디냐면, 낙스빌에 있는 어느 작은 마을입니다. 낙스빌이 왜? 이런 의문이 생기시지 않나요? 저도 낙스빌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정말, 오! 뜻 밖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서야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떻게 선정되었는지 알게 되었는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살기 좋은 그곳은’ 좋은 이웃이 있는 곳이라는 맥락의 내용이었습니다.
글이 주는 메시지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좋으면, 그곳이 살기 좋은 곳이고, 살고 싶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분쟁과 오해가 가득했던 곳이, 용서와 배려로 가득한 곳이 되면, 그 곳이 살만한 곳이되고, 가장 살기 좋은 곳 중의 하나라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처음 제 반응은 ‘이게 뭐지?’ 라는 조금은 허탈했는데요. 나중에서야 “그렇구나! “ 하면서 기사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네 사람들이 우리 같은 이민자를 무시하고, 나아가 모멸감을 주는 곳이라면, 그곳이 아무리 경치가 좋고, 범죄율이 낮고, 편의 시설이 많아도, 그 곳은 살기 힘든 곳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인가요? 라는 질문은, “여러분이 사시는 곳은 좋은 이웃이 있으신 곳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이 그 곳에서 좋은 이웃이 되어 주시나요?”라는 질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교회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그리워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그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4-47)’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고, 도와주고, 격려하고, 교제하는 그런 공동체, 그런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저도 저런 곳에 살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성도들이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된다면, 감히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가 멤피스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꿈을 꿔 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 그리고 맨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많은 증거와 증인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도들에게 몇 가지를 분부하시는데요. 그 중에 하나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지시기 전에 하신 일이 오늘 본문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볼께요.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여러 번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읽는데요. 갑자기 제 눈에 크게 보이기 시작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다니’라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데리고 가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진 겁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하나 하나가, 그냥 무심결에 하신 것이 없기에, 왜 하필 ‘베다니’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막 궁금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베다니’라는 동네로 데리고 가셨을까?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 동네도 있고, 예수님의 주된 사역지였던 예루살렘과 갈릴리 호수도 있는데, 그 많고 많은 마을 중에, 예수께서는 ‘베다니’라는 지역을 콕 찍어서 제자들과 가셨을까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 쯤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약 2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 베다니인데요. ‘베다니’라는 이름은 ‘슬픔의 집’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 슬플까요? 그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 때문인데요. 무슨 사연이 있냐하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한센병’에 걸린 사람이거나 그들의 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죄인 취급 받으며, 벌레 취급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래서 슬픈 동네가 바로 베다니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지나가다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재수 없다고 침 뱉음을 당하고, 돌팔매를 당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죄인들이 살아가던 곳이 베다니 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동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싫은 동네를 뽑으라면, ‘베다니’가 한 곳으로 선정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곳, 베다니를,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것도 하늘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말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곳을 기억하라는 것 아닌가요. 이 곳에 주님의 뜻, 주님의 마음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가 ‘베다니’에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3.
베다니는 예수님께도 여러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 전에 예루살렘 성에서, 주님이 여러 가지를 하셨는데요. 예를 들면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고, 바리새인과 율법사들과 치열한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밤에 휴식을 취하셨는데요. 그곳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직장이라면, 베다니는 예수님이 휴식을 취하셨던 집 같은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마 21:17).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편히 쉴 수 있는 좋은 호텔이 있어서 그 곳에 가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베다니라는 곳에는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병환자 시몬이 있었고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냐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이렇게 세 남매입니다. 베다니는 세상에서 가장 누추한 곳일지 몰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던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욕해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가장 좋고, 지내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주님이 다시 한 번 여러분과 제게 자각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이들의 부모는 누구일까요?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나사로는 결혼을 했을까요? 안 했을 겁니다. 부인 또는 자녀 이야기가 성경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입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부모도 없이 세 남매가,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경멸하는 동네에 들어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만 들어도, “무슨 가슴 아픈 사연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힘들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세 남매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여동생들이 예수님께 빨리 와 달라고 사람을 보내서 빨라 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이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결국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게 되는데요.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시기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리셨을 때, 동네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는데요. 그 때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줍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든 찬양이 있지요.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그 발 위에 입 맞추고 깨뜨립니다.
1절. 나를 위해 험한 산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2절.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3절. 주님 다시 이 땅 위에 임하실 그 때,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날 받아주소서.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에게, 주님은 이 일이 주님의 장래일을 준비하는 것이라며 말씀해 주십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마리아에게, 지금 돈으로 삼만 불 정도나 하는, 값비싼 향유를 낭비했다며,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더라면, 보다 가치있게 사용되었을 거라고 꾸짖습니다. 가룟 유다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 같아요. 옳은 말은 잘 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모으기 까지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 옥합은 가난과 멸시와 천대가 가득한 이 지극지극한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갈 수 있는 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소망을 모은 것이 옥합일 수 있어서 입니다. 그런 옥합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깨뜨려 버린 겁니다.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까요.
죽었던 오라버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준 예수님이 너무 고마워서 그랬을까요? 그랬다면, 향유를 팔아 주님이 좋아하시는 맛있는 음식이나, 입고 계셨던 옷보다는 좀 더 좋은 옷을 선물로 드려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렸어요.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소망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가 의지하던 것을 깨뜨린 것입니다. 다시 주어 담지 못하게 말입니다. 자기 결심을 돌이키지 않으려는 듯이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왜요? 그에게 이런 마음이 있어서 입니다. ‘이제 주님 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내가 주님만을 의지할께요. 주님만이 나의 신랑입니다. 주님만 내가 사랑할께요’ 라고 마음 말입니다. 주님이 마리아의 그 마음을 아시고 그를 위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4.
예수님에게 베다니는 이런 곳입니다. 친구가 있는 곳, 힘든 하루를 마치고 소박한 음식이라도 나눌 수 있는 곳, 험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베다니 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베다니는 어디인가요?
그런데, 베다니가 어떤 곳이라구요? 베다니는 슬픔의 집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모여 살던 슬픈 마을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욕하고, 저주하고, 경멸하고, 무시하던 곳입니다. 그런 곳이 기쁨의 집으로 변했습니다. 주님이 그 곳에서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님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셨고,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이웃이 되어 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살고 싶어하는 그 곳,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믿었던 성전이 있는 그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람들이 멸시하고 저주하는 그곳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준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그것 아닌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곳에서 주님이 승천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질문을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을 베다니로 데리고 가셨을까요?
주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보시기 위함은 아닐까요?
제자들에게 주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다시 한 번 보라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죽은 나사로가 부활했던 것처럼 나도 부활했음을 증거하신 것은 아닐까요?
삶의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품게 하시기 위함은 아니였을까요?
주님의 마음이 있는 그곳에서, 하늘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은 아니였을까요?
베다니가 주님의 뜻이 담겨진 장소라는 생각이 들자, 일주일동안 제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였습니다. 주님의 뜻이 있는 그곳에, 저도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곳이, 베다니는 아닌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예루살렘에 살면서, 가끔 아주 가끔, 생각나면 아주 잠깐 가는 곳이 ‘베다니’는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주님이 모든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오백여 형제가 누군지 궁금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주님이 오시면 잔치를 베풀어 주었던 마을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보다 먼저 나사로의 부활을 보았던 베다니에 살던 형제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는 그들을 끝까지 위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자 했던 주님의 뜻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찬양으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이 찬양은 예수님께서도 부르셨을 법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