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도에 개봉된 ‘증인’이라는 한국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 사건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법정에서 밝히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요. 한 여자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왜 인고 하니, 이 사건을 본 목격자 때문입니다. 재판 중인 이 여자는 자신이 그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살하려는 사람을 살리려고 했지만 잘 안된 것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눈물로 호소합니다. 이 여자의 이웃들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은 사람을 죽일 인물이 아니라며,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평소에 참 잘했다고 말입니다. 반면 검사측 증인은 할아버지가 타살로 돌아가셨다고 증언합니다. 검사측 증인과 변호사측 증인의 증언이 엇갈리면서, 누구 말이 사실인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증언을 한 검사측 증인의 말의 신빙성을 두고 법정 논쟁이 일어납니다. 왜 인고하니까,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자폐증’을 앓고 있는 15세 여학생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자폐증은 의사소통의 문제와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의 특징을 보이는 발달 장애인데요. 어린 여학생이 하는 말도 신빙성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논쟁이었습니다. 원래는 재판의 주 목적은 사건이 살인인지, 단순히 자살 사건인지를 가리는 것이었는데, 증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느냐가 재판의 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영화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정상이라고 하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과 그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선입견 또는 편견이 불편하다는 것을 넘어서, 얼마나 불쾌할 수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어째든 영화는 관객들이 자폐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애쓴 흔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며 특별한 면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되는데요. 저도 영화를 보면서 자폐증에 대한 이해가 생겼습니다. 결론적으로 목격자인 여학생의 말이 신빙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영화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죽음이 자살 사건이 아니라, 살인 사건임을 밝혀지게 되는데요. ‘증인’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말씀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제가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흥미롭게 여긴 단어가 바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증인은 법률 용어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예수님이 왜 이 단어를 하필이면 사용하셨을까 하는 궁금했습니다.
증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세상에 나가서 ‘너희가 지금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너무 쉬운(?) 부탁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화 ‘증인’을 보면서, 우리가 증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증인으로 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마지막으로 증인된 자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가 증인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예수님이 우리가 증인이라고 하신 말씀에 전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우리의 죄를 하시는 회개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내 안에 믿음이 없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증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평안이 없으면서, 내 안에 기쁨이 없는데 하나님에 대해 증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에게 없다면, 오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 증인이라’고 하셨는데, 제게는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우리 안에 기쁨이 없다면,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보고 증인이라고 했는데, 제게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저도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고 마음에 기쁨이 사라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니까, 이런 기도 밖에 안 나왔습니다. ‘주님, 제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주님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증인이 됩니까. 주님, 제게 임하여 주셔서 말씀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을 증거할 말씀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 주님은 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두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며,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확신이 우리 안에 있게 되었다는 간증이 우리 공동체 안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이 증인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3.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삶이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증인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살인 사건인지 자살 사건인지 구별하는 것은 증인의 증언이 결정적입니다. 따라서 증인의 말은 진짜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법원에서는 증인으로 나와서 거짓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밝혀지면 위증의 벌을 받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해 집니다. 믿을만한 사람이 증언하는 것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증언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믿으시겠어요. 당연히 믿을 만한 사람의 말입니다. 재판에서 증인의 신실함의 문제가 다루는 것은 그의 증언이 중요해서 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증언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바로 그 순간 법적 효력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김준곤 목사님의 기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보증 수표인 나라’가 되게 하소서. 제가 이 기도를 들으면서, 대학생 시절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제 심장을 뛰게 합니다. 김 목사님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 말은 절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한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집사가 하는 말은 믿어도 됩니다. 예수 믿는 장로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목사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나라가 우리 나라 되게 하옵소서. 이런 꿈 같은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이 바로 증인된 자들이 받는 영광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주님의 증인된 우리가 세상에서 증언해야 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흘 만에 살아나셨고, 그 이후로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계시며, 그를 믿는 사람에게 죄 용서함이 있다’라는 증언입니다. 특히 목사는 매주마다 이런 어마 어마한 이야기를 말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이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믿으라고 말해야 합니다. 목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증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두렵고 엄숙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회복해야 하는 말이 “집사님 말씀은 믿을 수 있어요. 장로님 말씀은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바로 ‘증인된 자의 삶’에 대한 회복입니다. 증인된 자의 삶은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말씀드렸던 고 이관희 집사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암으로 죽게 된 형제의 삶을 텔레비전으로 본 한 친구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니가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고 싶어’라고 말입니다. 그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저도 이 집사님의 친구의 말이 부럽습니다. ‘저의 삶을 보고, 나도 니가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어보고 싶다’라고 누군가 말해 준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살았다는 증거가 될테니 말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큰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곳이 교회가 되어 버렸고, 목회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증인이라고 불려지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증인된 자의 삶에 어떠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되니까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증인으로 이 땅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라는 기도가 절로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상이 썩었다고 욕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저의 말과 행동이 주님의 증인으로 부끄럽지 않은지 말입니다.
4.
마지막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용기가 필요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증언을 한 것은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유대인들을 앞에서 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증언하려면 용기가 필요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를 증언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그런 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2-36)’
베드로의 증언이 선포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 천명의 사람들 마음에 찔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한 말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였습니다. 주님을 증언했더니,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이 생기고 회개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 안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윤복희 권사님 이야기를 들렸는데요. 어떤 책을 읽다가 이 분의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소개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분이 미국에서 힘든 일을 많이 당해서, 머리를 식힐 겸 1976년 귀국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연을 하고 다녔는데, 하루는 지방 공연을 하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어 공연 중단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병원 검사 결과는 후두암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큰 오빠 윤영기 목사가 그를 위해 기도해 줬다고 합니다. 공연을 못하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에 대구 관객에서 인사라고 해야 되겠다고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빗 속을 120킬로미터로 달리다가 차의 유니버설 조인트가 부러지면서 세 바퀴를 돌아 분리대를 넘어갔는데요. 차가 천천히 돌다가 멈추는 것을 느끼고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진한 피 냄새를 맡으면서 무엇인가 보슬비 같은 것이 권사님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에서 계속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때 윤복희 권사님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곽규석 장로의 전도를 받고 성경 읽기를 시작했는데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통곡을 했다고 해요. 바로 2천년 전의 예수께서 이미 자신을 부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랬답니다. 그 후로 그녀는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다고 합니다. 화장도 안 한 얼굴에 청바지를 입은 채 길거리의 아무 가게나 찾아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윤복희가 미쳤다고 소문도 나고, 일간지에 기사화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찬양과 간증을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에게 있던 후두암이 말끔히 나아서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회당에 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예수를 믿던 사람들을 죽일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람이, 지금은 담대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서 그렇습니다. 당황하는 사람을 향하여, 사울은 더욱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주님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윤복희 권사가 담대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님을 만난 기쁨과 또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덧 입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한 두가지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도 약하고, 세상을 향해 일어날 큰 용기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쉽게 넘어지고 상처 받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 성령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누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과 성령을 받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즘 제 안에 성령에 대한 사모함이 생겼습니다. 저도 ‘누가복음’에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변하고 싶은 소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이 깜깜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고, 소망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은,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노인들은 꿈을 꾸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우리가 주님의 증인으로 이 땅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안에 확신이 생깁니다. 또한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부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요엘서 말씀으로 만든 찬양인데요.
이 찬양이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나의 영으로 모든 백성에게 부어 주리라.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 임하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