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표현 중에,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후에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흔히 죄 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쓰이는 한자성어이고, 불교 용어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상은 예전도 그렇지만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인데, 그렇다고 꼭 맞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결과나 표면상 나타난 현상으로 쉽게 판단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하거나 고난을 당했을 때, 그 일과 그 사람의 죄 또는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이를 듣는 이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 1-5절을 보면, 그 때 당시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과응보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 가지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첫째 사건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다가 죽임을 당한 것인데, 이를 두고 사람들이 수근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얼마나 죄가 많아서 예배를 드리다가 죽음을 당했을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반응에 이렇게 되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실제 이 일은 빌라도가 매우 치밀하고 기획적으로 저지른 살인이었습니다. 인간 빌라도가 얼마나 악하지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 잘못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국에서 일어납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소식이 그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기독교적인 반응은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습이 빌라도와 같지는 않은 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사건은 예루살렘 옛 성곽 안에 서 있던 실로암 망태가 무너져서 18명이 목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얼마나 죄가 많으면 저렇게 허무한 죽음을 당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 수군거림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실 망대가 무너진 사건은 전적으로 우연히 일어난 사건일 뿐입니다. 피해자가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에 잘못된 현장에 있다가 생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사건이나 고난이 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런 사건을 보거든, 누군가를 정죄하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와 책망의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2.
오늘 본문은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절을 보시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냐하면, 국가적인 재난이자 슬픔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다른 나라에게 침략을 당하고, 결국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절망했고,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안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 이런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저런 고난과 수모를 당하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할까요? 남은 유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의로와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의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된 후에, 하나님의 평가가 오늘 본문입니다. 다른 관점에서는 죄인 중에 죄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 광주리를 보여주십니다. 그 광주리에는 무화과가 담겨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는 이스라엘 또는 유다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요 식량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1절은, 바벨론에 잡혀간 사람들과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은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 앞에 놓여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삶은 어떻게 평가될까요?
하나님 임재 앞에서 포로된 자와 남아 있는 자들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이런 궁궁증을 일으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라고 하는 질문을 해야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모두는 극히 좋은 무화과 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정황상 오늘 본문의 초반절만 읽으면 극히 좋은 무화과는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반면 극히 나쁜 무화과는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같습니다.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에게 극히 나쁜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과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24장을 계속 읽어가면, 하나님 앞에 놓인 극히 좋은 무화과는 놀랍게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 놓인 극히 나쁜 무화과는 유다에 남겨진 사람들 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평가하셨을까요?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했고,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서, 자신들은 의로와서,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향해 ‘극히 좋은 무화과’라고 평가하시면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반면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 번 경고하시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는 평가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는 평가는 두렵지만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극히 기뻐하시는 사람은 고난 중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해줍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포로된 사람들은 망한 사람 같습니다.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한 없은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의 위로가 여러분과 저에게도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모든 일이 잘 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고난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무언가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고, 순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실 겁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과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라면 그렇게 고난을 많이 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고난을 많이 받는 것은 그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고, 믿음도 없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없고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도 없고 믿음도 강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극히 좋은 무화과이고, 고난을 받는 이들은 극히 나쁜 무화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좋은 무화과가 되는 사람들 중에는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매일성경의 해석대로, “삶이 평안하냐, 그렇지 못하느냐’로 신앙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하나님이 좋은 무화과 같이 돌보신다고 했을까요? 그 사람들이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운데, 기댈 언덕이 없으신가요? 그 언덕이 하나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또한 오늘 본문은 ‘고난 중에 있을 때’, 인생에서 설명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 줍니다.
첫째,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다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심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렘 24:4-7).
이쯤 되면,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웠노라 (시편 119:71)’라고 말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6)’ 이 말씀들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난도 고난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고난 당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히 좋은 무화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고난이 나의 죄 때문에 생긴 거라면, 하나님이 그 일을 깨닫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 자백하시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오래 참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어려움에 빠진 형제를 보거든, 그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그 일들을 통해 큰 일을 행하실 주님을 바라보시고, 그들이 그 일을 통해 좋은 열매 맺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주님의 인도하심이 포로된 자 같은 그들에게 임하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둘째, 삶에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평안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데 에너지 쓰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데 더 신경써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주님의 말씀은, 내가 극히 좋은 무화과가 아니라, 극히 나쁜 무화과 일 수도 있음을 명심하는 말씀입니다.
왜 극히 나쁜 무화과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 자신의 명예, 자신의 부, 자신의 학력, 이런 것들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못 먹게 된 극히 나쁜 무화과 같은 사람은 되지 말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주님의 무서운 경고가 나를 향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24장 8-10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지금은 유다에 남아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난 가운데 있게 되고,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말 거리가 되고, 조롱과 저주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도 받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극히 좋은 무화과 일까요? 아니면 극히 나쁜 무화과 일까요?
사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의 고난은 그들의 죄 때문에 아니라, 주님께 순종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고난도,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떤 광주리에 담겨 있을까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 일까요? 아니면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 일까요?
하나님이 보기시에 극히 좋은 무화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극힌 나쁜 무화과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놓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극히 좋은 무화과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돌보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심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공동체에 있기를, 여러분과 저의 가정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