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일인데요.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성경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잖아, 그런데 하필 사랑이 제일이지?”라는 겁니다. 참고로 저희 부부가 항상 이렇게 수준 높은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을 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는 질문 치고는 좀 심각했는데요. 귀찮은 듯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믿음이 강해 보였지만, 사랑이 없어서 문제가 많았던 교회였거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을 강조하느라 쓴 표현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럼 그 사랑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야, 아니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 거야’라고 보다 심도 깊은 질문을 하더라구요. 아내의 진짜 질문이 시작된 것인데요. 제가 대화를 신속하게 마무리하고 잠을 잤습니다. ‘내가 공부해서 나중에 알려줄께” 그러고는 잊어버렸어요. 기억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 아내가 여전히 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도 궁금해져서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왜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지’라고 말입니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다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때가 새벽이었는데요. 깨달은 말씀이지만 잊어버릴까 봐서 얼른 일어나서, 주님이 주시는 깨달음이라고 믿고 적어 놨습니다. 뭔지 궁금하시지요. 궁금하지 않으셔도 궁금하신 것처럼 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 가지가 생각났는데요. 그 중 하나가 ‘씨 뿌리는 농부 이야기’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물론 농부의 이런 행동은 습관을 따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믿음이냐 하면, 씨를 뿌리면 반드시 싹이 난다는 믿음입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또한 농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고 수확은 하면, 이로 인해 자기 식구들이 먹고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소망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농부에게 이런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는 불안해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불안하고 우울해 질 겁니다. “싹이 안나면 어떻게 하지? 열매가 안 열리면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느냐, 하루도 마음 평안한 날이 없을 겁니다. 이것은 농부의 마음에 어떤 믿음과 소망이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믿음과 소망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 농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기 까지 많은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잡초도 뽑아내고 가물면 물도 줘야 합니다. 이렇게 애지 중지 키워야, 이런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가을에 되었을 때 수확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믿음이 아무리 단단하고, 소망이 아무리 찬란해도 사랑의 수고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이 세 가지 항상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라는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말씀을 가정에, 교회에 적용해 봤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살펴보았는데요. 그리고 나서 내린 결론은 성경 말씀처럼, “사랑이 제일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이 있어야 현실이 된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이 안되면, 우리 삶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노 부부가 이혼을 하겠다며 판사를 찾아왔습니다. 노 부부의 말이 지금 마음이 안맞아 별거하고 있는데 이혼해서 남은 여생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자 판사가 안타까운 마음에,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으니 남은 여생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보시라고 열심히 설득을 했습니다. 판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 부부도 그럼 좀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판사가 화해의 의미로 치킨을 시켜 드렸습니다.
할아버지가 치킨을 보자 얼른 닭 다리를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벌컥 화를 내시면서 ‘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이에요.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 준 적이 없어요. 나는 닭 날개를 좋아하는데.. 늘 닭다리만 주네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정말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자신이 좋아하는 닭다리를 할머니에게 준 건데, 할머니가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정말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나도 지금까지 내가 좋아 하는 걸 늘 먼저 양보했는데, 고맙다고 하기는 커녕 늘 퉁퉁 부어서 불평 불만만 늘어놓다니. 이거참! 나도 할 만큼 다 했어. 더 이상은 안할 거야” 이렇게 노 부부는 과거 이야기까지 들춰내면서 싸우고는 집에 돌아갔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부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결혼 생활 내내 서로 희생하고 배려한다고 했는데, 그게 전달이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열심히 사랑을 표현했는데, 아이들은 자기들이 싫어하는 것만 해 준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키우는게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지혜를 구할 수 밖에 없겠지요. “주여, 우리 가정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리고 고린도 전서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우리 가정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가정에 사랑이 넘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 11:2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주님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2.
부활절 예배를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가복음을 주로 읽었는데요. 제 눈에 확 들어온 본문은 누가복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과 고린도전서 말씀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말씀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1절이 우리 인생을 축약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이 여자들에게 안식 후 첫날 새벽은 참으로 슬픈 시간입니다. 왜 슬프냐면, 이 여자들이 사랑했던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에게 예수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소망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은, 죽은 사람의 시체가 들어가 있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무덤이라는 공간은 그 사람에 대한 모든 믿음과 모든 소망과 모든 사랑이 사라져 버린 공간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여자들처럼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생은 무덤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도 희미해지고, 소망도 희미해지고, 사랑도 식게 만드는 공간이 무덤입니다.
물론 여자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믿음도 추억이고, 예수에 대한 소망도 추억이 되어 있으며, 예수에 대한 사랑도 추억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여자들 같다면, 안식 후 첫날 새벽은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슬픈 날이 될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주옥같은 메시지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셨던 천국 소망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도 추억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과거형이 되어 버린 안식일 첫날 새벽은, 슬픈 것입니다. 여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예수에 대한 그리움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혹시 이 여인들처럼 예수에 대한 그리움만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고 계시지는 않으세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 하지만 무덤에는 이 세 가지는 없습니다. 단지 무덤에는 그리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슬펐고 두려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나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예수에 대한 소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찬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권세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었습니다. 무엇보다고 제자들에게 있어야 할 예수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현실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기쁨이 없다면, 우리 인생이 슬픔으로 가득차 있다면, 우리 인생이 지루하다면, 우리 인생의 발걸음이 무겁디 무겁다면, 그것은 이 여인들처럼 썩어가는 시체의 냄새를 중화시켜줄 향료를 들고 무덤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한 그리움만 가지고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에게 있는 예수에 대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요?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소망이 되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사랑이신가요? 만일 예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과거형이라면, 여러분은 이 여자들과 같으신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그리움만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인생 말입니다.
만일 이런 분이 있다면, 안식 후 첫날인 오늘 아침이,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예수에 대한 소망과 예수에 대한 사랑이 현재 진행형으로 새롭게 바뀌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꼭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여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현재진행형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무덤으로 가는 여자들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무덤에서 돌아가는 여자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놀라움과 설레임이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에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이었냐하면,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자들에게 이 말씀이 기억되자,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에 대한 믿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에 대한 소망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사랑이 살아난 것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다시 사신 주님을 뵙지 못했지만,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안식 후 첫날인 오늘, 여러분과 제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면 우리의 믿음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면 우리의 소망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면, 우리의 사랑도 살아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들려주셨던 말씀이 기억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소망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에게 믿음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에게 사랑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이 부활하신 이 아침에 기억나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또한 바꿔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믿음이 약해진 것도, 우리에게 소망이 사라진 것도,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이 무덤덤해진 것,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아서 근심하고 있는 여인에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믿음이 약할 때, 소망이 사라질 때, 삶에 두려움이 몰려올 때, 외로울 때, 근심이 쌓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근심 속에 있는 여인들에게 임하자, 그들은 더 이상 무덤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망 없는 곳에 머물지 않았고,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지요?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에 대한 추억만 남아 있다면, 여러분 마음에 있는 예수는 여전히 무덤에 누워계신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도, 예수에 대한 소망도, 예수에 대한 사랑도 그리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여러분에게 들리어지기를 바랍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분은 “아멘”으로 화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증인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믿음이고, 소망이 되어ㅆ고, 주님이 우리의 사랑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열한 사도와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에게 분주히 뛰어다니며,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알리는 여인들의 발걸음이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이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이 이 아침에 여러분과 제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믿음이 살아나기실 바랍니다. 또한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이름을 믿었더니 너무나도 황송하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는 믿음도 살아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자녀도 사탄의 종도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소망은 천국의 소망인 것입니다. 이를 잘 표현해 주는 찬양들이 많지만, 그중 하나가 “예수 앞에 나오면”이라는 곡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예수 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 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예수 앞에 설 때에 흰 옷을 입으며 밝고 빛난 내 집에 길이 살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우리의 인생은 무덤으로 향하는 발걸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면 우리의 발걸음은 무덤으로 향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믿음이 또한 우리에게 천국 소망이 주기 때문입니다.
4월초에 멤피스에 있는 딕슨 갤러리에 교회 소풍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봄에 핀 예쁜 꽃들 구경하러 갔습니다. 저는 요즘 꽃이 너무 예뻐 보입니다. 갱년기간 봅니다. ㅎㅎ 그 곳에서 인상적인 조각상을 봤는데요. 세 명의 남자들이 벌거벗은 체 몸을 비틀고 머리는 숙이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상입니다.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양이 꼭 지옥에 있는 사람 같다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작품 설명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니까, 작품 설명이 ‘지옥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어서 입니다. 지옥문 앞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해요.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소망을 버리라’ 나중에 찾아봤더니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글귀 였습니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소망에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모든 소망이 사라진 곳이 지옥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이 계신 천국 소망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4.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소망은,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습, 아니 저의 모습을 알면 알수록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너무 커져서 그렇습니다.
지난 몇 주동안 틈나는대로 마가복음을 읽었더랬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뭐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믿을만한 존재도 아니고, 소망은 찾아볼 수 없고,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지내는 예수님을 향해 탐욕스럽고,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동안 함께 지냈지만, 예수님을 오해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자들 중 한 명은 자기 스승을 돈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오늘을 본문만을 봐도 그렇습니다.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헛소리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께서 3년 동안 제자들과 먹고 마시면서 열심히 그들을 가르치셨는데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목회에 실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복음서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시작은 화려했으나, 끝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는 목회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제자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그들에게서 소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스러운 구석도 없어요.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제자들보다 조금 나은 존재일까요? 저를 생각해 봤는데요. 전혀 그렇지 않았더라구요. 저는 주님께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입니다. 주님께 애교를 부릴지도 않아요. 맨날 징징 거리고, 항상 달라고만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는 꼴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저 자신도 헛갈릴 때가 있어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찬양하고 눈물로 기도하지만, 제가 사는 모양을 보면, 그냥 그래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저 자신도 알 길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판 가룟유다도 예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믿음이 있으셨을까요? 주님은 그들에게 어떤 소망을 품기는 하셨을까? 아니면 주님은 제자들을 그저 사랑만 하신 걸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믿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소망을 품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에요.
믿을만한 존재가 아닌데 믿어주세요.
소망이 없는 자들인데 소망을 품어주세요.
사랑스럽지 않은데 사랑해 주세요.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라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둘째 아들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살았습니다. 자기 마음껏 살았다는 말은 흥청망청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기억해 냅니다. 돼지가 먹는 주엄 열매를 먹다가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면, 둘째 아들은 믿음이 참 안 가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없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이 아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아시나요.
그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버리지 않았어요. 마찬가지로 아들에 대한 소망을 놓치 않았고요, 그 아들을 끝까지 사랑했어요.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아들이 돌아오게 될 길을 보면서 그가 오는지 지켜봤습니다. 이것이 뭘 말해줄까요. 아들이 가진 믿음보다, 아버지가 가진 믿음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들이 가진 소망보다, 아버지가 가진 소망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둘째 아들이 가진 사랑보다 아버지가 가진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믿어주셔야 해요. 부모는 자녀에 대한 소망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나중에 깨닫게 될 거예요. 부모님의 믿음이 자기의 믿음보다 더 크고, 부모님의 소망이 자기의 소망보다 더 크고, 부모님의 사랑이 자기의 사랑보다 더 크다는 것을 말입니다.
5.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어떻게 변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을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 사람 아닌가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재판장에도 따라갔어요. 하지만 그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욕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미리 아셨어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크게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주님은 끝까지 베드로를 믿어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부어주시고, 그 소망대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 사랑처럼 그가 부활을 꿈꾸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믿어주신대로, 소망하시는대로, 사랑해 주신대로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주님이 여러분과 저를 믿어주십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소망을 품고 계십니다. 어떤 소망이냐 하면, 주 안에서 새롭게 되는 소망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그리고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것 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소망대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사랑해 주신대로 될 것입니다.
함께 찬양합니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그 분은 사망 권세 모두 이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