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많은 분들이 시원한 바람부는 해변가에 가십니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과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그리고 한가롭게 날아 다니는 새들을 보면서 우리는 치유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열심히 사느라 수고했다!’고 말이지요. 잠시 동안이지만, 바다를 보면서 사람들은 삶의 무게를 잊어보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대한 바다를 보면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중 한 명이, 아이작 뉴턴입니다.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노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많은 진리가 거대한 바다처럼 내 앞에 일렁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여서 이렇게 말했어요. ‘진리의 대양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나는 그저 해변의 조개 껍질을 줍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위대한 발견이라고 말하는 만유인력 법칙도, 해변에 있는 모래알 한 개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뉴턴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릴 때 들은 내용이었지만, 제게 이런 뉴턴의 말들은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위대한 과학자가 하는 말은 좀 색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위대한 발견을 하고도, 그 발견이 모래알 수준이라고 말하는 뉴턴의 겸손함에 감탄했는데요. 그러면서도 그의 말이 제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더랬습니다. 왜냐면, 제가 그가 했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였습니다. 그래도 나이도 들고, 공부도 좀 했고, 경험과 경력이 쌓인 지금은 뉴턴이 한 말이 다행히 이해가 됩니다. 그가 했던 말이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 아니 학자들도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자연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걸 경험하게 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지 아시겠어요? 자연도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데, 하물며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 공부하고, 수 십년 동안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3)”
이번 여름, 혹시, 바닷가에 가시면, 해변을 걸으시다가 모래알을 하나 집어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씀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것보다 작구나”라고 말입니다.
2.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만 아는 것 입니다. 혹시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한꺼번에 다 알려주시지, 왜 조금씩 알려주실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제가 연구소에서 일할 때, 참 어려워했던 일이 기억이 났습니다. 제가 어려워 했던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제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묻습니다. “무슨 일 하세요? 그러면 제가 ‘연구원이에요’ ‘그래요?” 그럼 무슨 연구하시지요?” “네, 저는 단백질 연구해요”.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단백질!” 그러면 제가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네, 저는 단백질을 먹는 걸 좋아하지만, 연구도 한답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가지 못합니다. 제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데, 너무 간단히 대답했는데, 제가 무례한 건가요? 아미면 그 분을 배려해 드린 건가요? 배려해 드린 것이 맞겠지요! 제가 했던 일을 문의한인 사람들에게 다 설명드릴 필요도 없고, 행여 제가 말해도 그 분이 알아들지 못하고 나중에는 지루해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불친절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두 다 설명해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배려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셔도, 우리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열심히, 여러 번, 자세히 말씀해 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음을 기억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궁무진하시며 우리는 너무나도 제한된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맞는 순서 같습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성령이 계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신다는 믿음으로, 그 분을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장황하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냐면, 간난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간난 아이는 부모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부모님의 이름도 모릅니다. 부모님의 성도 모릅니다. 부모님의 직업도 모르고, 좋아하시는 음식도 모릅니다. 고향이 어딘지로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중요한 것들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간난 아이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저 사람이 아빠고, 저 사람이 엄마라는 것입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무슨 소리를 내면, 눈을 깜박 거리면서, 방긋방긋 웃어주면 끝이에요. 배가 고프면 ‘앙!’ 하고 울면 되고요. 간난 아이가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어떤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인식하는 수준이에요.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지식은 아이가 자라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장성해서 부모님의 이름도 알게 되고, 고향이 어디신지, 좋아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심지어는 부모님의 마음도 알게 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했어요.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 2:25) ’
다윗이 알고 있었던 것은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제일 중요해요. 주님의 자녀로 주님 앞에 항상 서 있는 것.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그 분이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버지 앞에서 방긋 방긋 웃는 것 뿐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기면 주님 앞에서 울면 됩니다. 그러면 그 분이 달려오셔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우리를 먹여 주시고, 우리를 길러 주십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가지는 포도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3.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이 오신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
사도행전 2장에 성령 세례는 강한 바람과 불처럼 임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성령 세례는 오늘 본문처럼 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이실 겁니다. 성경에서 성령이 강한 바람과 소리, 그리고 불처럼 임하시는 것은 사도행전 2장 기록이 전부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묵상하고 기도하고, 공부를 하다가, 이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표적, 기사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너무 제한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 (요 3:8)’
성령 세례는 예수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 날을 알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날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 세례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수 천가지가 넘습니다. 아내를 통해 예수를 소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을 통해 예수를 소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분도 있을 겁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 말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낮은데로 임하소서’라는 소설을 읽다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제게 성령의 부어지심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제가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제 삶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궁무진 하셔서 그렇습니다.
구원은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성령이 사람의 육체에 임하셨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 모시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비교해 보면, 보잘 것 없는 것이 우리의 육체 아닌가요! 병이 들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서 피부가 예전 같지도 않고, 얼굴에 주름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연약해지는 곳이 육체인데, 그런 곳에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 육체에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이 주의 은혜요, 복음인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거듭난 사람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성령 세례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으며, 성령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으시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멘!
4.
이런 성령 세례와 구별되는 말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데요. 그것이 성령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충만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찬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 말을 오늘 본문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지금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이것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로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간단한 말이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 마음에는 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 속 의자에 주님이 앉아 계시고 나는 의자 밑에 무릎을 꿇어 앉아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성령 충만하지 않다는 것은, 마음에 있는 그 의자에 내가 앉아 있고, 주님은 그 의자 아래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우리 마음 속 왕좌를 주님께 내어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오늘 본문처럼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사도행전 2장에서 설교하고 있는 베드로는 설교 준비할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처럼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교정할 시간이 없었다는 겁니다.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했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즉석에서 설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생겼습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설교한 결과입니다. 이 장면은 사역자인 제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에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설교하도록 말이지요.
또한 이 일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여러분에게도 중요한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는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18-20)’
우리에게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의 증인으로 살고자 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이여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가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다 (마 10:18)’. 주님이 우리 입에 할 말을 주신다는 믿음을 붙잡고,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 분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시려면, 먼저 우리 마음이 청소되어야 합니다. 왜 제가 청소되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세상의 온갖 걱정과 욕심과 더러움과 음란함과 부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곳에도 성령님은 떠나시지 않으세요. 하지만, 그런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는 슬퍼하시고, 근심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가득차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쓰레기들이 가득해서 그래요. 저희 집에 사시는 그 분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버려야 한다! 버려야 청소가 된다! 그래서 집이 너무 깨끗하다 싶으면 다 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깨끗해 졌다 싶으면 다 버린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청소하는 방법도 같은 원리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깨끗하지 못한 것, 더러운 것, 음란한 것들을 다 버려야 청소가 됩니다. 또한 버리는 일의 전문가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이 우리 마음을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청소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는 우리 마음과 생각이 담겨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이 달라지면,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먼저 아는 것이 우리 주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이 성령 충만해지자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나라 말을 배운 적이 없어서 입니다. 배운 적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을 알아 들을 리가 없습니다. 120여명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성령의 말씀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있을지 아시겠지요. 그래도 성령의 말씀하심을 따라 말하고 싶으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으면, 상황을 파악해서 지혜롭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하는 말이라면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우리가 하는 말을 할고 싶고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나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내 지혜로 말했다가 사람들이 오히려 화가 나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입술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통제해 주셔야 합니다.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제해 주셔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성령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더라도, 내 귀에 이상하게 들려도, 그 말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자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알아듣고 놀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위로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런 일이 좀 일어났으면 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말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이 바뀌었으면 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부모의 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해서, 우리 자녀의 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해서, 교회에서 우리가 나누는 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험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게 되신 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들도 성령 충만해지자 듣게 된 말이, 다른 사람들의 조롱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여러분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거든, 이상히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놀라지도 마세요. 당연한 현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령에 충만하게 되자, 예수님은 광야로 끌려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조롱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성령 충만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면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아마도 상대방을 향해서 분노하고 같이 조롱하는 말을 주고 받을 거예요.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똑같다는 겁니다. 또한 조롱 받아다는 느낌에, 우리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에 내상이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말에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 근육이 튼튼해져서 그래요.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거뜬히 이겨내셨어요. 예수께서 성령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악한 것을 선으로 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함께 서서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높여서 이렇게 말했어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행 2:14-15)”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살고,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이 우리에게 할 말을 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악으로 이기지 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게 되는 기적 같은 삶을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그 사람들과 관련된 몇 개의 성경 구절을 읽어드림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행 4: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행 13:9)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
이런 기록 중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5절 말씀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
스데반의 이름 앞에 그를 소개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주님이 스데반에게 붙여주신 수식어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수식어가 우리 이름 앞에 붙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아무개. 여기에 여러분과 저의 이름도 쓰여지기를 바랍니다.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모든 결과는 ‘기도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인들이 모여 기도하고, 주를 찾으면, 어떻게든지 복음은 능력으로 전파되고, 그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 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공식은 2,000년이 넘도록 변치 않는다고 짐 심발라 목사님이 말하는데, 이 말에 저도 동의 합니다.
그래서 함께 부르고 싶은 찬양은 “우리 함께 기도해” 라는 찬양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