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주 부자였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는 소와 양이 많았고, 가난한 사람은 암양 한 마리가 그의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암양을 식구처럼 대했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같은 상에서 먹고 마셨고, 주인은 마치 자기 딸처럼 양을 귀여워 했습니다. 어느날 부자집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 양과 소가 너무 아까워서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손님 대접은 해야 했기 때문에 부자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한 마리 밖에 없는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아다가 그것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삼하 12:1-4)
이 이야기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왕은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지만, 누구든지 그런 짓을 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모든 것을 주었지만, .. 왕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나단이 이야기 속 부자보다 더 나쁜 사람이 다윗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야기인줄 알고 화를 냈던 다윗은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깨닫고 많이 놀랬습니다. 나단의 말을 듣고 다윗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던 것이니다. 다윗이 이 일이 있은 후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이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고 괴로워했는지를 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즐거움이 사라지고, 찬양이 사라지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그에게 가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자의 행동에 화를 내고 의로운 척 했던 제가, 사실은 제가 그렇게도 미워했던 부자보다 더 나쁜 짓을 해 버렸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하나님 잘 믿는 사람처럼 말하면서, 제 삶은 그 어떤 사람보다 더러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고 말입니다.
2.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때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예수는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안되면 누구라도 쉽게 버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그래서 그들이 한 일이 바로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저주의 상징에 예수를 못 박고, 자신들은 의로운 척, 거룩한 척 했던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을 베드로가 그의 설교를 통해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에서 말하는 바가 또 무엇인가요?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저주하고 조롱했던 인물은 힘 없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너희 이익을 위해서, 너희 욕심을 이루기 위해, 너희가 의롭게 보이려고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 뿐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베드로가 담대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
주’는 주인입니다. 너희의 주인, 너희들 인생의 주인, 이 땅의 주인, 너희의 모든 것의 주인이 예수이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은 너희가 기다리던 메시야, 너희가 찾고 있는 메시야, 그 분이 바로 이 예수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거 큰 일 났구라 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큰 일을 저질렀구나. 우리가 다 죽게 되었구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인 죄를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를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한 자신들의 죄를 깨달은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어떻게 할지 모르는 사람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사람들이 접하게 되는 좌절과 불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질문인가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시기에 오셨다면, 그 예수도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것 같고, 우리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 같은데, 사실은 그러면서도 죄 없는 예수를 정죄하고, 죄 있다고 하고, 저주하고 조롱하는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 예수의 소식 앞에 우리의 마음에 찔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절망감이 있으신가요? 나는 멋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작은 욕심에도 쉽게 무너지고, 작은 유혹에서 쉽게 넘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을 속이고, 비난하고, 힐난하고, 저주하는 나의 모습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마음의 모습이 담겨져 있음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때 우리 마음에 일어나야 하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 말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 세요. 우리에게 꿈을 주세요.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세요. 우리에게 희망을 주세요.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세요’라는 외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슬픔 속에서 기쁨을 노래하고 싶은 자들의 외침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우리가 죄인됨을 알게 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3. 베드로가 전한 복음.
사람들의 탄식같은 질문에 베드로가 전한 복음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행 2:38-39)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십니다.
회개는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하여 갔던 발걸음의 방향을 바꿔서 하나님께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다윗의 모습,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진짜 나 자신의 모습, 그것이 죄악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죄인 것입니다.
저희 집 정원에 잡초가 한 가득입니다. 제가 따로 심은 것도 아니고, 물을 준 것도 아니고, 영양분을 준 것도 아닌데 잡초는 무럭 무럭 잘도 자랍니다. 잡초를 보면서 제 스스로 말합니다. ‘내 마음의 잡초도 저렇게 무럭 무럭 자란다’라고 말입니다.
잡초약을 뿌리지 않으면 잡초로 정원이 다 덮혀 버리듯이, 우리 마음의 밭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잡초가 무럭 무럭 자라납니다. 우리 마음 밭에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도 자라납니다. 처음에는 작은 나무 같지만, 나중에는 거대한 나무가 되어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있는 쓸데없는 것은 작을 때 잘라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안에 있는 나쁜 마음들, 악한 마음들, 욕심들, 이기적인 마음들, 이런 것들이 자라지 못하게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의 악함은 죽이고, 주님의 선하심을 사모하는 마음은 살리는 것이 회개의 결과입니다.
다윗이 시편 38편이 이렇게 말합니다.
‘..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집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 ‘
죄악 중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괴로움 가운데 있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죄의 무게. 그 무게를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우리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나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모두 사함을 받은 것과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되심을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또한 예수와 내가 더불어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에는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성령이 함께 해 주시면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설교를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못 박아 죽였듯이, 사실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를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고, 예수를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살리셨습니다. 나아가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부분들이 예수의 빛으로 밝혀졌을 때, 우리 안에 이런 탄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말입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탄식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탄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 악한 것들을 비출 때, 우리 안에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이런 탄식이 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해서, 누구나 이런 탄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설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인 행동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한 일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던지고,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의로운 분노로 포장해 버렸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라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라고 말입니다. 우리 안에 키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고 말ㄹ입니다. 우리 안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이런 탄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다시 한 번 들어보세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행 2:38-39)
이 세대는 패역한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 비결은 우리의 탄식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우리의 답답함이요. 우리의 절망이요. 우리의 슬픔이지만, 이 질문이 우리를 주님께서 인도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선하신 주님,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아서 범죄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죄악의 잡초들을 키우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이 땅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바라기는 주님을 닮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순결한 주님의 백성 답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