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가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은 예수 승천 후에,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과 성전에 모여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으로 넘어오면서 오순절이 되자, 제자들이 모였던 곳에 성령이 임하는 있는 장면이 초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제자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75세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될 때 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때가 75세 였다면, 하나님의 때는 아브라함이 100세 였을 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힘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할 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라났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그들의 오빠인 나사로의 병을 고쳐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그 일이 일어났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두 자매가 원하는대로 나사로의 병이 나았다면, 그들은 좋아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실 더 큰 능력은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러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주님의 때에 주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함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 뿐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경험하게 되는 반응들
제자들이 성령 충만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첫번째 반응이 7절에 나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놀라며 신기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우리에 대한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 삶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우리의 예전 성품은 사라지고 우리 안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우리 삶은 이렇게 놀랍고 신기한 일로 가득차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성령 충만해 질 때, 사람들의 다른 반응이 13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조롱입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주님이 약속하셨던 성령이 임한 제자들 입장에서는 신이 났을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경험합니다. 그 성령은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신기한 말을 하게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말을 알아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는 일은 놀랍고 신비롭고 신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보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고, 주님의 일을 할 때도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겪게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조롱하는 소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조롱부터 합니다. 원래 사람들이 그런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소리에 너무 민감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가 낙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 베드로의 행동은 우리가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가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수군거리고, 조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베드로가 담대해 졌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예전의 베드로를 아시지요? 주님이 돌아가셨을 때 도망치기 바빴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두려움에 떨었던 인물입니다. 예전의 베드로 였다면 이런 시기에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해지자, 두려움은 없어지고, 담대함으로 사람들에 서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다른 열 한명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사람들 안에 생겼을지도 모를 오해를 먼저 풀어줍니다. ‘제 삼시’라는 말은, ’ 아침 9시’ 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아침부터 술 먹고 취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사람들이 조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는 것은 자랑입니다. 누군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조롱하면, 우리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주님을 자랑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요엘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지금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성경을 이루고 있음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다시 말해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는 예언의 영인 성령이 임했고, 그래서 환상을 보았고,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꿈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비전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주의 영이 부어진 사람들에게 생명의 역동적인 힘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 막막한 세상, 갑갑한 세상, 소망이 없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비전에서 나오고 꿈에서 나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자랑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이 주신 지혜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이 베드로의 입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말은 성령을 통해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이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서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담대함과 그에게 생긴 지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베드로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말씀을 읽을 때,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우리가 말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나이 뿐 아니라 신분과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18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남종과 여종은 사람 대접 못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처럼 대우 받는 사람들에게도 성령 충만은 일어납니다. 성령 충만은 비천한 사람도 존귀한 사람으로 바꾸어줍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고, 사람들의 세계관도 바뀝니다. 성령 충만은 연약한 사람들을 주 안에서 강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야기여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을 자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는 세상의 끝을 의미합니다. 19-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어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 날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 얼마나 무시 무시합니까. 그 날은 주님의 일을 조롱하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힘겨운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 기쁨의 춤을 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라는 말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신분 여부와 상관없이, 부와 권세와 상관없이’ 라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심판의 날이 기쁨의 날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님의 구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아담의 아들인 셋이 낳은 ‘에노스’ 때의 사람들입니다. 에노스 라는 말은 ‘깨지기 쉽다’ ‘약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 하나님 없이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구원으로 화답하십니다.
성령 충만의 비결은 우리는 연약하다는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깨어지지 쉬운 존재들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어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충만하십니까? 성령 충만하시길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성령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10)’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증거.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은헤와 평강에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