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화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랑에 대한 모든 설명은 주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가장 잘 나타난 곳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완성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소망이며, 동시에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소망도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 그 만큼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언젠가 신비로운 방법으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시작과 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시 죽음에서 깨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다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삶이 있음을 또한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삶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전쟁 중에 신실하게 예수를 믿었던 아내와 세 자녀를 잃었습니다. 그 분이 울분을 토하시면서, 하늘에 대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냐고” 말입니다. 충분히 그 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역사의 현장에도 하나님은 계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갈 때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았을 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하나님 아버지는 그 곳에 계셨습니다. 모든 순교자들이 죽는 현장에도 누구보다 아파하시며 그들 옆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유태인이 600만이 도살되는 현장에도 침묵의 증인으로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옆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정의가 사라지고,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입니다.
여러분, 삶이 힘들 때 주님의 부활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수수께끼 같을 때 주님의 부활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질문과 답이 나와 있는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는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는 것보다 주님이 베드로를 더 많이 믿어 주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믿으시되 끝까지 믿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또한 가장 먼저 반응했던 사람였습니다. 만일 저에게 이런 제자가 있다면 참으로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삶을 보면 믿음직하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은 믿음직스럽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잡혀 있는 그곳에 베드로가 몰래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동태를 살피고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단번에 알아 보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고, 마지막 세번째 질문에는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호언장담을 했지만, 막상 자기의 목숨에 위험이 생기니까 한 없이 비겁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 계신 곳에 와 보기라도 했지만 다른 제자들은 다 흩어져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런 제자들이라면 있으나 마나 아닌가요?
그런데 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한결 같았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직 스러운 제자들도 사랑하셨지만, 그렇지 못한 제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다”는 부분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게 될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신뢰가 갈 때도 믿어주셨지만, 그렇지 못했음에도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잠시 동안 버렸지만 말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모든 것을 믿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직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를 끝까지 장래의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믿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믿음대로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다고 했는데, 이 믿음에는 장래의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믿어주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믿음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75세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의 약속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1)”
한 명의 자녀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믿음 크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믿음대로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본인을 형편없는 집안의 자손이고, 집에서 가장 작은 자로 여겼습니다. 자존감이 낮을대로 낮아진 이 사람을 하나님이 뭐라고 불렀을까요? 바로 “큰 용사여!”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믿으시고, 그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믿음은 모든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자신감도 없고, 신뢰도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믿어주시는 분입니다. 긍정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이 보일 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모도 자녀들을 믿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자녀들이 잘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아이들이 실수할 때도, 자녀들이 어리석은 일을 할 때도, 믿음직스러울 때만 아니라, 여전히 부모는 자녀들의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대답할 때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을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도망쳤던 베드로. 또한 주님을 욕하고 저주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베드로에게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주님의 양을 베드로에게 맡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그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든 것을 믿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베드로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주님이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것은 그가 믿을만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믿을만한 사람은 믿어줍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믿어주는 일은 정마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의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아무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여전히 베드로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회복되기를 주님이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실패해도 우리를 끝까지 믿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믿어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를 믿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믿어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어주는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은 그 믿음대로 그 사람을 바꿔줍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기브온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믿어주신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