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윗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그의 사전에 패배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승리이시며 나의 깃발이시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는 왕의 아들을 친구로 둔 사람입니다. 또한 골리앗과 수 많은 블레셋을 무찌르고 왕의 사위가 된 사람입니다. 또한 감수성도 있고 음악성도 뛰어납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칭찬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삶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미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 왕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윗을 죽이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특별히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다윗이 사울 왕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자기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다윗은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다윗이 친구인 요나단에게 했던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삼상 20:1)’
다윗의 삶에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망자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도망자의 삶은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다윗은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항상 주변을 경계했습니다. 다윗은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다윗은 잠도 평안히 잘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은 하나님과 여전히 함께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생기면 항상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나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라고 하나님께 묻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왜 이와 같은 시간을 허락하셨는지 우리 인간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예측하거나,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거룩하신 하나님께 엎드리는 일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다윗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했으며,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고, 어떤 경우는 결국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이 당했던 일들이,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에게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들에게도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 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런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일들을 말하여 두는 것은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 한 말을 도록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6:1-4)’
우리 삶이 다윗과 같았다면 우리는 사실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사람들이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일어난 일들이,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이를 기억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를 기억만 해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게 됩니다.
“저 사람에게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 무슨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일 거야’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2.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간 곳은 놉입니다. 놉에는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도망친 곳이 성소라는 의미입니다. 성소는 거룩한 곳.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성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우리는 거룩한 곳을 찾아갑니다. 다윗은 하루 하루를 초조하게 살아야 하는 도망자 신세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윗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 보여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다윗의 모습은 수준 이하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초라한 다윗의 모습이 우리 눈에는 보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보기에 다윗의 말과 행동은 실망스러움 그 자체 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물론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도덕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아무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사울 왕이 자신을 이곳에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빵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입니다. 그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삼상 21:8)
그러자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준 것은 골리앗의 칼 이었습니다.
‘골리앗의 칼’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믿음의 증거이자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큰 산을 옮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골리앗의 칼’이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며 거대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던 나이 어린 다윗의 신앙 고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 골리앗의 칼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도망자 다윗에게 필요한 물건인지도 모릅니다.
성소에서 거짓말을 하고, 율법을 어겼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에게 먹을 것과 그에게 필요한 칼을 주셨습니다. 이 부분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라는 질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소에 찾아온 다윗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에 성전에 온 이유는 허기진 배를 채우고, 손에 들 무기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한 다윗이 처해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성전을 떠날 때의 모습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의 배는 음식으로 채워졌고, 그의 손에는 골리앗의 칼이 들려졌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나 성전에서 나왔을 때나 다윗의 신분은 도망자 신세로 바뀌지 않았지만, 다윗은 성전에서 나올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하기는, 여러분에게 다윗에게 임했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우리의 배가 부르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그런데 성소에는 다윗 말고도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도엑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 왕의 목자장이었습니다. 그도 다윗과 같은 시간에 성소를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성소에 온 이유는 다윗과 달랐습니다. 그에게 성소는 단순히 종교 생활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엑에게 거룩한 곳 성소는 출세를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도엑에게 성소는 인맥을 넑히고, 정보를 얻는 곳이었습니다. 도엑은 나중에 다윗이 아히멜렉을 만났다는 것을 사울 왕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을 통해 도엑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늘리고 싶어했습니다. 삼상 22장을 보면, 도엑은 사울 왕의 명령에 따라 아히멜렉을 포함한 85명의 제사장을 죽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어린 아이부터 가축까지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학살을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도엑을 이런 일을 하면서 거침이 없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왕과 나라에 충성하는 것으로 포장했습니다. 따라서 도엑에게 성소는 자신의 악함을 감추기 위해 매우 적합한 곳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도엑과 다윗은 성소라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도엑은 더 나빠졌습니다. 도엑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창세기에 나온 가인의 모습이 떠 올랐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면, 가인과 아벨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과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 뒤 기록은 살인 사건입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 어떤 이는 더 나아지지만, 어떤 사람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문제가 생기면 거룩한 곳을 찾아갑니다.
교회 예배당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기도처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우리에게도 굶주림과 두려움이 있음을 주님께 그대로 보여드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도 우리에게 필요한 빵과 칼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찾아온 거룩한 곳에서 우리의 배 고픔이 사라지고,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로 바뀌는 일들을 경험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이는 예배를 드리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더 나아지지만, 어떤 이는 같은 예배를 드리고서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모습과 자세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업드려 경배하는 자에게 주님은 빵인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칼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심령이 강건해지며, 세상을 이겨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다윗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