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바로 바알 신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신이 바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도 동시에 믿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시대에 그렇게 번창하던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나중에 이스라엘이 멸망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 ,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 눈으로 보면, 바알은 우상이고 잡신에 불과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 들었고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심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겼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진짜 신을 놔 두고 가짜 신을 섬기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금한 겁니다. 어째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과 더불어 바알을 섬기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궁금증이 있었는데, 알게 된 책이 있었습니다. 이진희 목사의 ‘가나안에 거하다’라는 책입니다. 책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쉽게 바알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나안 땅의 특성과 관련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가 잘 되려면 필요한 것이 ‘비’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비를 내려 주는 신이 바로 바알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비와 바람과 천둥과 번개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서 잘 살려면 농사가 잘 되어야 하고, 농사가 잘 되려면 하늘에서 비가 충분히 와야 하는데, 비의 신인 바알 신에게 잘 보여야,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보인 것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풍요롭게 사는 가나안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러운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살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 초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나안 사람들과 똑같이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예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니고 바알도 함께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바알 신과 여호와 신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요. 이진희 목사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바알 종교에는 죄, 회개, 구원, 순종, 하나님 나라, 사명, 소명 같은 것이 없다. (다음 부분이 여호와 신앙과의 차이기도 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 바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바알에게 넘어갔던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바알은 자기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든 관심이 없습니다. 바알은 자신을 섬기는 자들의 삶 속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도록 내 버려 두는 것이 바알입니다. 그래서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바알에게 제사만 잘 드리면 그만이었습니다. 당연히 죄를 지어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또한 가나안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는, 바알이 아내인 아세라와 성관계를 가질 때 나오는 정액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들면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신당에서 집단으로 난잡하게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바알 신이 그것을 보고 흥분해서 아세라와 성관계를 하면 비가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 다른 어떤 것보다 성적인 타락이 심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알에게 인신 제물을 바치기도 했는데요. 이 때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은 바알 산당에서 가진 난잡한 성관계를 통해 낳은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니까 인신 제물을 바쳐도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무척 관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의 삶에 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아무렇게나 사는 것을 불편해 하십니다. 제사 보다는 순종을 더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면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런 제물은 역겹다고 제발 바치지 말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심판이 있지만, 제물을 잘 바치지 않는다고 심판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주시지도 않고, 필요한 것만 주시고, 자족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은 바알보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신이 더 매력으로 다가 오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가나안 땅에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이 매력으로 다가 왔습니다. 반석을 쳐야 물이 나오는 하나님보다, 샘에 물이 가득하게 해 주는 바알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보다 바알을 섬기며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이것이 염두하고 읽어야 할 부분이 열왕기상입니다. 오늘 읽은 열왕기상 2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여기서 ‘그 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 왕인 아합에게 그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의 말이 있은 후입니다. 열왕기상 20장 42절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 (벤하닷 입니다)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니라 하셨나이다’라고 하는, 두렵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내용을 아합 왕이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합 왕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메시지를 듣고 왕이 ‘근심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만 보면, 아합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이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사마리아로 갔는데, 그 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죽게 될 것이고, 자기의 백성들도 자기 때문에 고생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듯 하더니,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 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아합 왕은 나봇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합니다. 나봇의 포도원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준다는 제안과 그게 싫으면 돈으로 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봇이 아합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나봇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아합 왕의 반응이 4절에 나옵니다.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해 하는 장면이 열왕기상 20장에 이어 두번째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합 왕에게 속상한 일이 두 번이나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두번의 아합 왕의 반응 중에서, 어떤 반응이 더 심각하냐? 하면, 나봇의 포도원을 얻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근심하고 답답해 하는 정도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듣고서 보여주었던 근심하고 답답해 하는 정도보다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은 자기 욕심보다 못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아합 왕에게 하나님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바알 보다 못한 신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합 왕에게 필요한 존재는 자기 소원대로 뭐든지 해 주는 바알이지, 자기가 한 일을 비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 왕은 이 일을 아내인 이세벨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바알과 아세라를 열심히 섬기던 이세벨은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얻을 수 있는 계책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 계책이라고 하는 것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해서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은 나봇과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죄를 물어 죽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나봇은 이세벨의 계략처럼, 나봇을 잘 아는 마을 장로와 귀족들을 통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합 왕은 자기가 원하던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합은 이 일에 대한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기쁨만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데요. 나봇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죽임을 당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당혹스럽고, 또한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포도원을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는데 거짓이 난무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율법을 동원해서 악을 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봇은 하나님 율법을 지키려다가, 율법에게 배반을 당한 듯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성공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실패하고 죽는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어떤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살고, 예수 믿으면 축복 받고,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예수 믿으면 장수하고, 예수 믿으면 무엇을 하든지 살아남아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심을 쫒으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라고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바알을 쫒으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이런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바알을 섬기는 왕과 왕비의 탐욕 때문에, 또한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비겁함에 의해 살해 당한 사건이 오늘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오늘 본문의 난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난제가 되었을까요?
3.
그것은 예수 믿으면 성공하게 될 것이다는 믿음과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 본문에서 성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찾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요?
아합 왕 아닌가요! 이세벨 아닌가요! 왕이요, 왕비로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입니다. 잘 먹고 잘살고, 원하는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다고요?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알은 아합 왕이, 이세벨이 어떻게 살든지 관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진희 목사의 책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소개해 드리면, 그가 말하는 바알은 이런 신입니다.
‘바알은 성공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풍요롭게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창고를 채워 주겠다고 약속한다. 형통하게 해 주겠다고 부와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귀가 쏠깃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합 왕을, 이세벨을, 장로와 귀족들을 닮고 싶어합니다. 오늘 날의 바알은 물질 만능주의고, 돈이고, 성공이고, 형통인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바알을 숭배합니다. 바알이 주겠다는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바알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공하기 위해, 잘 살기 위해,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더 높아지기 위해 바알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화인 것입니다. 쾌락이 지배하는 세상, 물질 문명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알을 믿지 않습니다. 바알을 믿는 것은 미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도 바알이 준다고 믿었던 그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알 종교는 아주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모두는 바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그 옆에는 바알 신이, 또한 아세라 신상을 같이 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나봇의 죽음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간 나봇의 죽음은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줘도 거절했습니다. 그는 더 좋은 기회가 준다고 해도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게 쉬운 일인가요? 아닙니다. 물질 만능 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는 모략과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기회를 버리고 어리석게 고집을 부리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나봇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봇처럼 살 수 있을까요?
옳은 일, 바른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손해 보더라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죽음을 당하더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나안 땅입니다. 풍요롭습니다. 좋은 집과 직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공이 우상인 땅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성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높은 땅이 가나안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그런 곳입니다. 성공을 꿈꿀 수 있는 나라.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는 나라. 그런 기회가 많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꿈 같은 나라이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바알 신이 최고의 신이 되어 버린 나라. 윤리가 바닥을 치고, 쾌락을 추구하고, 남의 것을 훔쳐도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가 미국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어떤 면에서 우리 조국인 한국도 마찬가지 모양새입니다. 경제가 최고입니다. 잘 살면 경제가 잘 돌아가면,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습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은데, 법으로 사람을 모략하고 죽인다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죄로 가득했습니다. 가나안 땅이라고 부르기 전 소돔과 고모라가 그렇게 죄로 가득했습니다. 성공한 인생이 부러우신가요? 맞습니다. 성공한 인생 부럽습니다. 원하는 것은 다 얻을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뭐 든지 할 수 있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아합 왕이 되고 싶고, 이세벨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성공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공한 인생을 약속하지도 권면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성경은 승리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아합 왕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왕으로 살았으면 성공한 것 아닌가요? 그렇지만 그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죄에게 굴복했고, 바알에게 굴복하고, 우상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반면 나봇은 어떤가요? 그는 소위 성공한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승리한 삶을 살았습니다. 열왕기상 21장 17절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그의 죽음에 반응하시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선조들도, 어떤 면에서는 성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해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 중에는 돌에 맞아 죽기도 했고,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형편 없는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우리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들은 불쌍하게 살다간 것 아닌가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승리한 인생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성공도 하면서 승리도 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승리를 선택했으면 합니다.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성공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을 더 사모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또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