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하신 일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신 것. 둘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일. 셋째.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살펴 주신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희가 이 땅을 살면서 해야 되는 일도,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해야될 일도 당연히,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 때가 되든지 안되든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 그리고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눈을 들어 저희들이 사는 지역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할 일을 보여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우리도 이 땅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는데요.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는 온 동네에 예수의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나병 환자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2절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오셔서, 누구의 집에 있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 방 마다 사람으로 가득찼고, 심지어는 문 밖에도 사람으로 넘쳐났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계신 집에 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예수의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러 오신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도 있을 겁니다. 친구따라 구경 삼아 오신 분도 있을 거구요. 아니면 아내의 손에 붙잡혀서, 권능 많으신 예수께 안수 받으려고 온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려서, 예수께서 혹시 고쳐주실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가 무슨 사기를 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사람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처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예수의 말씀이 진리인지, 율법에 반하는 것은 없는지 확인하러 온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주님이 계신 곳에는, 다양한 목적과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교회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가 건물이라면, 힘이 약해서 문을 닫는 교회는 주님이 죽으셨단 말이 됩니다. 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비록 교회 건물의 문을 닫아도, 그곳에서 예배드렸던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다시 주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인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마 18:10), 교회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임에 두 명이 와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세 명이 모이는 모임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곳에 주님이 계시므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모임 가운데, 강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뭘까요?
축복을 받기 위해, 마음의 평화와 얻기 위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마음의 병과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으러 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주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사모해서 오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고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라, 습관처럼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주일에 다른 곳에 가면 왠지 ??해서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친구 만나러 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또한 성경을 잘 가르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오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설교 분석하러 오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주님이 계신 교회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차는 곳입니다. 나이도 천차 만별이지요. 직업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 주님이 계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중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저는 믿습니다. 나와 똑같지 않다고 비난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배려이지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배려입니다.
제게 어느날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뭘하러 교회에 왔지?’ 언제 이런 질문이 생겼냐면, 아이들 키울 때입니다. 사실 저보다, 아내가 더 고생을 했습니다. 아니, 엄마들이 사실은 모두 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아이들 키우는게 쉽지 않지요. 주일에 예배드릴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예배 시간이라고, ‘부모님 예배 잘 드리세요’ 라고 배려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습니다. 배고프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웁니다. 걷지도 못하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기어다니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맛있다고 집어 먹습니다. 걷기 시작한 아이들은 이것 저것 만지면서 일을 만듭니다. 예배 시간에 엄마들이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만해도 다행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예배가 끝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난 아이 엄마들의 특징은, 예배를 집중해서 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들에게 들어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교회에 뭘하러 오지?’ 라는 생각입니다. 30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찾아오는 기나긴 시험의 시간입니다. 인내가 많이 필요하고, 인내를 배워가는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믿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급함,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한 갈급함,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가지고 주님이 계신 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머니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예배 시간에 아이들 때문에 조금 시끄러워도 좋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것 같지요. 주님이 계신 곳은 항상 이렇게 시끌 벅적했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되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이 계신 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로 넘쳐 났습니다. 그 중에는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를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되는 한 사람이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중풍 병자의 친구들이 사람들에게 부탁했을 것입니다. ‘제 친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계신 집에 있는 사람들은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을 배려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우리도 급하다구요. 우리도 주님을 보고 싶다구요.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혹시, 우리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요? 주님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 주님을 진짜로 만나야 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우리에게 있나요?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모일 수 있어서 너무 좋지만. 그러나, 혹시 우리가 중풍 병자와 같이 주님을 급하게 만나야 되는 사람들의 앞길을 막고 있지는 않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필요하지만,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분 중에 그런 사람이 있나요? 중풍 환자 처럼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 주변에는 중풍에 걸린 사람이 거의 없어서, 중풍이 얼마나 심각한 질병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 보면서, 중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뇌졸증이라고 불리는 중풍병은,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뇌혈관이 터지는 뇌출혈이 있다고 합니다. 두 질환 모두 심한 경우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고, 살아나도 반신불구가 되는 후유증이 있는 질환입니다. 한국인 사망 원인 중, 암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질환이 중풍입니다.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못하고, 거동을 못하게 된다는 것은, 본인에게 가장 큰 충격이지요. 그리고, 이들을 돌봐야 하는 가족들은 생활에 큰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풍을 소리 없이 찾아오는 행복 파괴범 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가족과 자신의 행복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 중풍입니다. 중풍은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겪는 질환이기도 한데요. 어떤 의사의 말을 인용하면, 중풍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급격한 감정적인 변화(화냄, 슬퍼함, 흥분, 근심, 걱정, 놀람)을 회피하고, 명상이나 기도를 통해 평정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기도하면, 중풍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제 말이 아니고, 의사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좋은 친구들 – 믿음 안에서 만나라
어째든, 중풍은 참으로 무서운 질환입니다. 하루 이틀 불편하고 아프면 되는 병이 아니라, 수 십년을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처럼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은,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소자야’ 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했으니, 중풍 병자가 예수님보다는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어린 나이에 중풍에 걸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젊은 중풍 병자에게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믿음이 좋은 친구들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은 예수께서 자기 친구의 병을 고쳐주실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친구의 몸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중풍이 고침 받을 것이라는 믿음 입니다. 이런 믿음이, 친구들에게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바로 지붕을 뜯고 친구가 누운 상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길을 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당시의 집의 지붕은 네 명의 남자가 한 명의 환자를 들치고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접근이 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한 지붕도 비만 새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친구들의 행동은 매우 도전적으로 보이지만, 친구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믿음을 보신 주님도 이들의 행동에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풍병자가 마태복음 9장과 누가복음 5장에도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믿음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폴짝 폴짝 뛰면서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세상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실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믿음의 친구가 여러분이 되시면 더욱 좋지요. 꼭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중풍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자
친구들과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먼저는 주님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으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막 2:10). 둘째는 어떤 죄인지는 알수 없지만, 본문에 나오는 젊은 사람의 죄로 중풍이 생겼을 가능성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모든 질병이 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는 죄 때문에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따라서, 병에 걸리면, 하나님께 혹시 내가 범죄한 것이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질병도 많은데, 하필 중풍 병자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했을까 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중풍과 죄가 닮았다는 것입니다. 중풍에 걸리면, 온 몸과 혀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지만, 가족들에게는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나만 아프고 되는 질병이 아니라, 중풍은 온 가족에게 고통을 줍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아무리 힘이 세고,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젊어도, 아무리 연륜이 있어도, 중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죄가 그렇지요. 젊다고, 나이가 들었다고, 재산이 많다고, 많이 배웠거나, 적게 배웠거나, 죄를 지으면 무기력해 집니다. 죄는 나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을 고생시킵니다. 죄의 속성이 너무나도 많이 중풍과 닮았습니다. 중풍이 무섭다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우리가 알라는 것이지요. 중풍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는 중풍같은 죄를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로 말미암아 우리 뿐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계신 곳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용서하심입니다. ‘소자야, 네 죄가 사함을 얻었느니라’ 여러분과 저에게도 이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게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중풍 병자와 같이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은 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오신 여러분!!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여러분의 자녀들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직장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가정 문제로 머리가 아프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중풍 병자에게 해 주셨던 말씀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교회에서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딸아,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 막 2:5)’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제 삶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