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 생일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 생일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말헤 주지 않지만, 한 날을 정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생일에 주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묵상하고, 나아가 주님의 제자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는 일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구주는 구원자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을 부은 자라는 뜻인데, 이것은 왕이고, 제사장이고 메시야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차마 부르지 못해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쓰던 용어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2장 11절을 풀어써 보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다윗의 마을에, 죄악 속에 빠져 있는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 태어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며, 메시야 이십니다. 또한 그 분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날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래 전 부터 계획하셨던 일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는데, 여자의 후손인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하시고, 약속하셨던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수 많은 선지자들과 사람들이 가다리고 기다리던 그 분이 태어난 날입니다. 당연히, 이 소식은 온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이겠지요. 합격을 기다리는 수업생에게 “합격”이라는 단어가 큰 소식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소식은 큰 소식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기쁜 날이어야 합니다.
지난 일년 동안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여러분을 짓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오늘은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2. 기쁨을 표현하라.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으실 겁니다. 성탄절 트리와 선물입니다. 성탄절의 트리 장식하는 일은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르틴 루터가 시작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루터가 크리스마스 저녁에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둡던 숲이 등불을 켜 놓은 듯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전나무 위에 달빛이 비추어지면서 주변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마르틴 루터가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둠 속의 초라한 나무와도 같지만,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주변에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존재가 될 수 있다”라는 깨달음입니다. 루터는 사람들과 이 깨달음을 나누면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보았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면서, 이 메세지를 여러분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념하고, 또한 우리도 예수님의 빛을 발하면서 살자고 말입니다.
또 크리스마스 트리와 관련된 다른 설은 독일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 주지 못해서, 나무에 종이로 인형이며,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서 전나무에 걸쳐 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거미가 나무에 거미줄을 쳐서 아침 햇살에 거미줄이 금실과 은실을 두른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어머님의 사랑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합니다.
저희 집에도 성탄절 트리가 있습니다. 집 사람이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꼭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 밑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차곡 차곡 쌓아 놓습니다. 그리고 항상 버릇처럼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릴 때에 어머니가 그렇게 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일에 자기는 가장 큰 선물을 받아 봤다면서, 아이들에게도 이 추억을 남겨 주고 싶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일 덕분에 아이들도 나누고 받는 기쁨을 알게 하고 싶어서 입니다.
어떻게 성탄절 트리가 시작되었든,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도 아이들 선물을 잔뜩 가져다 놓고 싶습니다. 선물을 받는 기쁨만큼 주님이 오신 이 날이 기쁘고 의미 있는 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표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 하시는 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에 이런 추억들이 차곡 차곡 쌓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추억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 주고 싶습니다. 또한 성탄절은 온 가족이 모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3. 영광과 평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날, 천사들과 수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또한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4)”
‘더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성탄절은 영광과 평화가 있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날이며,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넘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자꾸만 성탄절이 끔찍한 날로 바뀌고 있습니다. 온갖 사고가 넘치는 날, 그래서 겨우 살아남는 무서운 날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생일인 성탄절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날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평화는 모두에게 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주님의 평화가 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평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기겠지요? 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잠언 21장 3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다른 성경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생활이 형식적인 제사보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한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은 의로운 생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이 닮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거만한 두 눈과 교만한 마음, 악인의 형통하는 것 등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악인의 형통하는 것은 죄입니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은 죄가 더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시거든, 부러워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을리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불안하고, 걱정이 많겠지요. 비록 다른 사람들 눈에는 형통하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거짓된 혀로 모은 재산은 흩어지는 수증기 같다, 죽음을 불러오는 함정이라고 했습니다. 악인은 난폭하게 굴다 다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을리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시편 147편에는 11절에 “여호와는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며,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쉬운 성경)”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것이 평화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절대 평화입니다. 돈과 힘으로 살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인생의 폭풍우 속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시는 평화는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웃과의 관계 회복, 이것이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오셨을 때 나무 뒤에 숨었던 아담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 평화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기지요?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이 비유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족이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교인들이 이웃이기를 바랍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도움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지나치던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른 도울 사람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 인생에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웃이 되었으면 합니다. 웬수가 아닌 이웃 말입니다.
한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예요. 한 성도 분이 건강상의 어려움으로 직장도 가지기 어려워졌어요. 정부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교인들이 이 분의 사정을 듣고, 걱정이 많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당회에서 일정기간 동안 이 분의 전기세를 내 주기로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잘 한 일 일까요? 아니면 잘 못한 결정일까요?
또 다른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오랫동안 집사로 교회 봉사를 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도 어려운 일이 생겨서 생활이 곤란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나마 하던 일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교회에서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의견이 갈렸다고 해요. ‘교회가 도와줘야 한다. 한 식구데..’라는 의견과 ‘교회가 무슨 자선 단체냐?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히신테니 우리는 기도만 하자’ 결국 당회에서 없었던 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집사님의 형편을 알지만, 모르는 척 지나갔습니다. 이 분을 위해 기도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집사님은 어려운 시간을 보내셔야 했고,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강도만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도움입니다. 그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닌, 도움을 주는 그런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이고,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방법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강도 만난 사람이지요! 가난한 사람이지요! 그럴 수 있지만,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가족이며, 우리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도움을 받는 것보다는 도움을 주는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도전하신 것이지, 도움을 받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족에게 여러분이 이웃이 되어 주세요. 우리 교인들에게 여러분이 이웃이 되어 주시길 바라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 분들이 다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시는 사업도 번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직장에 우리의 자녀들이 취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회에서 건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4. 누구든지.
여관이 빈 방이 없어 구유에서 누워계셨던 예수님을 가장 먼저 보려온 사람들은 목자들입니다. 가난했던 사람들, 사회적으로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천사들이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하려 온 사람들은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이웃과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학벌이 높던 그렇지 않던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이 넒게 열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라는 찬양입니다. 성탄절에 우리 삶에 있어야 할 고백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다” 이런 고백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부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