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삶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땅에서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하고 다짐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 동안 계획하신 일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금을 더 걷기 위해 호구 조사를 했지만, 우리는 이 일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루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인 요셉이 이 때문에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삶에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마리아의 삶에 일어난 일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 것도, 그를 통해 메시야가 태어난 것도 마리아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를 잉태한 것도 마리아에게 힘겨운 일일텐데, 아이를 낳을 때에는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가야 했다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더욱 힘든 일은 아이를 낳을 시기가 가까워졌는데 아이를 편하게 낳을 곳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방을 구할 수 없다지만, 임산부인 마리아에게 아무도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는 점이, 마리아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에게 주어진 공간은 양과 나귀들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놀라운 일이고, 처녀가 잉태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욱 놀라운 일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야가 태어나셔서 뉘이신 곳이 구유라는 점입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해 자네 (찬송가 114)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구유에 뉘이신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3.
성탄절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전에 들어보셨음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는 미국 어느 마을에 ‘윌리’라는 9세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윌리는 조금 특별한 아이입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지적 능력이 조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자 교회 주일 학교에서 성극을 준비했습니다. 선생님이 윌리도 성극에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며, 윌리에게 작은 배역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윌리가 맡은 역할은 여관집 주인역이었습니다. 윌리의 대사는 한 마디였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어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윌리에게는 이 짧은 대사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이 대사를 연습하고 연습했습니다. ‘방이 없어요’ ‘방이 없어요’ 결국 윌리는 이 대사를 외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도 선생님도 윌리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모두 기뻐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성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탄절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연극을 준비했던 사람들도 긴장이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잘 할 수 있다’ 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윌리에게 많은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연습한대로만 하자’ 라고 말입니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방이 있는지 여관 주인에게 물어 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금방 출산을 할 것 같으니, 방 하나만 달라고 간청합니다. 윌리는 연습한 대로 ‘방이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다시 한 번 간절히 요청합니다. ‘제발 방 하나만 주세요.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 같아요’ 이 말에 윌리는 ‘방이 없어요’라고 다시 말합니다. 이 말은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고개를 떨구고 힘 없이 무대 뒤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윌리가 이 장면을 보고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던 것입니다. 무대 뒤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윌리, 빨리 나와’ 아무리 신호를 줘도 윌리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윌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갑자기 대사에도 없던 말을 해 버립니다. ‘요셉, 마리아, 내 방을 쓰세요.’ 라고 말입니다. 각본에 없는 말을 해 버린 윌리 때문에 예배당은 한바탕 웃음이 터졌습니다. 연극이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윌리에게 저런 역을 맡겼냐며 원망섞인 소리도 들렸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오랫동안 준비한 건데, 윌리가 망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이 나중에 사람들에게 울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윌리의 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윌리에게는 어렵고 곤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4.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예수께서 오셨던 2천년 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2천 년에는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구세주가 태어나신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밤 새워 양을 지키던 목자’들과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이 전부였습니다. 또한 헤롯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못 마땅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의 탄생이라고 하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천사가 노래한 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고 요란하게 축하도 합니다. 매년 거리에는 하늘의 별보다 더 발고 빛나는 불빛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 맞춰서 선물을 준비하고,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사처럼 예수의 탄생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2천년전의 성탄절과 지금의 성탄절이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뭔가에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보다 다른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전히 머물러 계신 곳은 마굿간입니다. 여관은 많지만, 예수님을 위한 방은 여전히 마굿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위한 방은 없고, 그 방에는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윌리와 같은 아이의 눈에도 임신한 여인의 부탁은 간절한 것입니다. 성탄절에 마리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이를 낳고 뉘일 수 있는 작은 방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도 마리아와 요셉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마리아와 요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뉘이셨다는 것은 사람들 마음에 그 만큼의 공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그런 공간이 있으신가요? 그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는 더 이상 마굿간에 있지 않아도 됩니다.
5.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아이를 낳기 위해 여관 문을 두드렸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돌아왔던 대답은 ‘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들의 곤란한 처지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이 사람들 마음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똑 똑’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우리의 대답은 주님을 위한 방이 준비되었다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분주합니다. 성탄절이 되어가니까 더 분주해 집니다. 선물도 사야되고, 장도 봐야 합니다. 그 분주함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두드리십니다. ‘똑 똑’ 빈 방이 있나요? 라고 말입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에는 빈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을 모실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유에 뉘이신 예수는 현대 교회에게 이런 메세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마련한 방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 방은 마굿간 입니다. 보기에는 형편없이 보일 수 있지만, 그 곳에는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께서 뉘어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누구든지 오라!’ 고 말입니다.
구유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곳입니다. 특별한 형식을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천사의 초대를 받고 올수도 별을 따라 올 수도 있는 곳입니다. 멋진 옷을 입었거나, 더러운 옷을 입었거나, 누구든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구유입니다. 이것이 또한 현대의 교회가 들어야 할 메세지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문턱이 낮았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주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차별이 없고, 기쁨이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누구든지 와서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주님을 위한 빈 방이 있으신가요? 또한 주님이 계신 교회는 누구든지 와서 함께 주님을 경배할 수 있나요? 우리 스스로에 물어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