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
지난 주와 같은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오늘 본문을 계속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고난’이라는 단어 때문인 듯합니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계획 속에 있는 고난의 이유는, 고난을 통해 우리로 예수를 경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로 십자가의 길을 경험하게 하심입니다. 우리로 주님을 닮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의 고난이 주를 믿는 지체들에게 용기와 위로가 된다고 했습니다. 주를 믿는 않는 이들에게는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증거냐 하면, 우리가 주를 믿는 증거, 예수의 사랑이 나타난 증거, 예수의 흔적이 나타난 증거라고 했습니다. 모순 같지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던 분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사명은 고난이다” 라면서 비장한 각오를 해 보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에서 주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아도, 인내하면,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에 주님이 우리를 맞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고난으로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야 되는데, 자꾸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 부분에 자꾸만 제 마음 추가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고난임을 알았던 다소 사람 사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길을 갔을까 하는 질문을 제게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말을 되새김질하다가, 다소 사람 사울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동기가 깨달아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 그가 살아갈 이유. 그 이유를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소 사람 사울에게 주님이 도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최고로 가치가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길을, 최고의 가치를 위해 살아라.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말에 무게를 두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이 자주하는 질문이 있는데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폴 틸리히라는 사람은 ;고대인에게는 죽음의 문제, 중세인에게는 죄의 문제, 그리고 현대인에게는 의미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 의미의 문제’ 모두 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인 제게 더 깊이 다가온 것은 역시 ‘의미의 문제’였습니다.
우리 삶이 가치가 있느냐?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느냐? 나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고 있느냐? 나에게 무엇이 중요하냐?
삶의 의미,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소 사람 사울이 발견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자기가 핍박하고 모욕하고 조롱했던 그 가치가 최고의 가치로 바뀌었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발견한 사울에게 고난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깨달음도 생겼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괴로움이 아니라, 견딜만한 것입니다. 삶의 가치를 발견하면 고난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모험이고, 어떤 분에게 고난은 오히려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 제 삶의 가치는 ‘좋은 논문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밤 새워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 다음날 또 실험하고 하면서도 불평이 없었습니다. 돈을 좀 덜 벌어도 괜찮았어요. 옆에서 아무리 구박을 해도, 핍박을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삶의 가치가 ‘논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문에서 저의 존재 가치를 찾았습니다. 논문이 제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하여, 받아야 되는 많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는 약한 편에 속합니다. 저보다 세신 분은, 미모에 삶의 가치를 두신 분입니다. 예뻐진다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뼈를 깍는 고통도 참아냅니다. 살을 찢는 고통도 인내합니다. 그 까짓 고통은 고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합니다. 예쁘지 않다고 다른 사람들에 무시당하는 것이 더 싫습니다. 성형 수술한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상관없습니다. 나중에 예뻐진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랄 그 날을 기다려 지니까 말입니다. 배고픔도 참을 수 있습니다. 몇 끼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요. 미모를 위하여, 미모를 위해서라면, 온갖 고난은 기꺼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가치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삶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온 열정과 시간과 돈을 쏟아 붓습니다. 이것이 가치의 힘입니다. 가치를 발견하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칭찬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고난과 비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나무 치료사 라고 소개하는 우종영 님의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나는 인생에서 일이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존재 가치를 발견할 수 없으면 그 삶은 늘 허기질 수 밖에 없다. 즉 일을 한다는 건 돈을 버는 행위를 넘어 삶의 양식을 얻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가치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더 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처음 내가 나무를 치료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바보 같다는 말이다. 돈이 안되는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며 비아냥대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 .. 내가 하는 일이 곧 나 자신을 말해주며 내가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내 인생을 대변해 준다고. 그런 마음으로 살다보니 비록 남들 눈에 바보처럼 보였을지언정 늘 마음은 풍족했다.
내 인생의 최고 가치를 발견하는 것. 그 일은 우리 삶에 허기를 채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삶이 허기진 이유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섯도, 남들 눈에 바보처럼 보였을지언정 늘 마음은 풍족했다. 고난이 있으나 내가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이, 진짜로 가치 있는 일은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중에는, 그렇지 중요하지 않거나, 변하거나, 거짓된 가치들이 있습니다.
김원태 목사님의 [가치혁명]이라는 책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뉴욕에 있는 어떤 부자가 오랜 세월동안 값비싼 골동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6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모은 골동품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여행간 사이에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이 확 들면서 잠 못드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최신형 도난 방지기를 설치하고 집 지키는 무서운 개도 두었는데, 마음이 여전히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해 났다고 해요. 그것은 뉴욕 뒷길에 있는 화방에 가서 싼 그림을 많이 구입해서 그 그림 밑에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림마다 십만 달러, 이십만 달러, 백만 달러.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가격표를 붙이고, 이 가짜 가름들을 자신이 아끼는 진짜 골동품 사이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하고 돌아와 보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해요. 어떤 물건이 없어졌을까요? 도둑님(?)께서는 부자가 아끼는 골동품은 그대로 놔두고, 엄청난 가격이 적힌 그림들만 다 가져갔다고 합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가져가는데 도둑이 목숨이 건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수 많은 가치들이 있습니다. 가족도 있어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 모두다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부풀려서 가격표를 붙여놓은 것도 있습니다. 1불짜리 싸구려 그림을 10만불, 100만불 이라고 여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헛된 가치에 속으면, 우리에게 한 번 뿐인 인생만 낭비하게 됩니다. 엉뚱한 곳에 우리의 열정과 시간을 쏟아붓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시험을 받으실 때 거부하신 것들도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돈과 인기와 명예와 세상 자랑을 버리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 길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다소 사람 사울의 심장을 심하게 뛰게 해 준 말. 그 말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그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그의 삶에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은, 그가 “똥”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면, 그 삶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쏟아 붓는 열정과 시간과 돈이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겁니다. 기도가 가치 있다고 말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은 기도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겁니다. 가족이 가치 있다고 말하지만,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가족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가치를 발견하면,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돈과 정성과 열정을 쏟아 붓게 되어 있습니다.
다소 사람 사울이 발견한 최고의 가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버린 최고의 가치입니다. 여러분의 가치도 예수 그리스도 이시길 바랍니다. 저에게도 최고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님의 제자라고 부릅니다. 주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동지요 믿음의 동무라고 합니다. 최고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형제들과 자매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기를 선택한 다소 사람 사울이 경험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선물 같은 시간인데요. 그것은 다메섹에 사는 제자들과의 교제였습니다. 19절입니다.
19절: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 중에는 아나니아가 있습니다. 사울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고, 사울이 성령 충만하도록 기도해 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울을 ‘형제’라고 불러준 최초의 사람입니다. 또한 다메섹 제자들은 사울이 눈을 뜬 후에, 그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믿어준 사람입니다. 사울이 눈을 뜨고 별로 그냥 집에 있었지만, 다메섹 제자들은 사울을 믿어줬습니다.
사울과 다메섹 형제들이 며칠동안 뭘 했을까요? 그들이 밥만 먹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밥만 같이 먹어도 됩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회복이 되니까요.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쉬어도 누구랑 있느냐에 따라 위로를,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를 처음 믿는 분들이 있다면 그냥 밥만 같이 먹어도 좋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밥 먹으면 힘이 생겨요. 주님이 그를 강건하게 하실 겁니다.
그래도 며칠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사울과 다메섹 제자들이 밥만 먹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들이 서로 이야기했을 거예요. 사울은 자기가 예수를 어떻게 만났는지. 다메섹 제자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을 지켜오고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다메섹 제자들은 사울에게 자기가 믿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메시야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했을 겁니다. 다소 사람 사울이 영육간에 회복할 수 있도록, 다메섹 형제들이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매우 의미있는 시간. 귀한 시간이 다메섹 형제들과 보낸 ‘며칠’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며칠은 서로의 영혼과 영혼이 통하는 신비한 경험이 이루어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신비한 경험을 우리는 친밀함이라고 부릅니다.
현대 교회에서 많이 아쉬운 부분이 바로 ‘친밀함’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지만,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형제들간의 친밀함을 찾아보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나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생하는 동지가 있다는 의식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한 발자욱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울과 다메섹 제자들 간에 이루어진 영혼과 영혼의 만남, 우리에게도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 그런 친밀한 관계들이 더욱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교인들이 늘어날수록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맥도날드의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라는 책을 형제들 모임에서 함께 살펴보고 있는데요. 그 책에서 ‘친밀감’을 영혼의 결합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남자들은 야구점수, 주식투자, 못된 직장 상사, 나라 망치는 정당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아무런 부담 없이 잘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상대방을 좋아하는 이유, 내 삶에서 달라졌으면 하는 것, 내가 느끼는 슬픔이나 두려움, 이렇게 창피한 기분이 드는 이유들 같은 영혼의 문제를 나누는 일은 어려워 한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과 친밀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명 쯤은 내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의 깊은 갈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제자들. 그 사람들이 사울이 다메섹에서 만나 제자들이라는 겁니다. 이는 또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될 사람들에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선물의 시간을 여러분도 받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꽤 오래 전입니다. 교회에 왔는데, 우연히 이웃 중국 교회 야후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야후 목사님이 저를 부르세요. 그리고는 점심 한 번 먹자고, 그것도 사 준다고 하셨습니다. 약속 시간에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요. 야후 목사님이 자기 젊을 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기가 목회 시작하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말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다는 말씀이 ‘포기하지 말라’는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충성하라 고 하십니다. 목사님과 밥 먹은 일이 저를 강건하게 했습니다. 주님이 제게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3.
주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게 될, 사울은 몸이 회복되자 유대인들의 회당에 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변화된 사울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딱 부러지게 복음을 전했는지, 2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공동 번역으로 보면, 자신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는 사람들을 향해, 더욱 힘있게 전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울의 열심입니다.
사울은 본성이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열심은 그의 가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주의 제자들의 위협하고 살기를 띨 정도였습니다. 즉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가치를 가지고 했던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며 한 일들이지만, 사실은 자기 만족을 위하여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는 자기 만족이나 자기 명예로 자기 존재 가치를 찾고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하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의 의를 위하여’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22절에 나오는 사울의 열심은 우리가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그가 보인 열심은 자기 만족을 위한 열심도, 그의 명예를 위한 열심도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의 열심은 그의 자연적인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정으로 해야, 고난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심으로 해야 고난이 와도 열정이 식지 않습니다.
또한 사울은 나중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사울은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의 열심은 그의 열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열심이 우리를 지치지 않게 합니다. 주님이 주신 열정을 있어야 고난이 와도 견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고난이 오나 주님이 건져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울이 경험한 것이 바로 “고난에서 건짐을 경험하는 믿음”입니다.
사울이 전도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사울의 제자들이 사울의 피신시킨 것이 바로 그 일입니다. 사울의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 그에게 사울의 제자들을 통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선물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나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선물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4.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울에게 주신 또 다른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생 함께 할 동역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 동역자의 이름은 ‘바나바’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사귀고자 할 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사울의 변화를 믿지 못했습니다. 틀림없이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텐데도, 제자들은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때 사울을 믿어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사울을 믿어준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통해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한 사람.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한 사람.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 그런 한 사람만 있어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니라고 해도, 내 편을 들어주는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고난이 와도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동행해 주는 사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이 보내신 선물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 받아야 하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꼭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제가 되기를 또한 기도해 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사울의 변화를 가장 먼저 믿어준 사람은 다메섹에 사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사울의 변화를 믿어준 사람은 회당에 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변화에 놀랐고, 나아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냥 척하는 것이라, 진짜로 변했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 바나바가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나바에게 사울에 대한 믿음을 주셨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냥 믿어지고, 그냥 믿어주는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이 바나바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없다면, 사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찾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 자기가 살아온 이유를 찾고 싶어합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여러분에게 그런 가치들이 찾아지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인생을 거룩하게 소비할 수 있는 큰 가치. 그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함께 동역할 지체들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에 영혼과 영혼이 통하는 친밀함이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을 함께 이겨내고 서로 믿어주고 서로 격려해주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은 사람하면 떠 오르는 인물 중에 ‘주기철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의 설교문이 있어서 찾아서 읽어봤습니다. 그 분의 설교 중에 ‘십자가의 길’에 대한 설교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다. 그 길은 진리의 길이다. 그 길은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그 길은 하늘의 평화가 넘쳐 흐르는 길이다. 그 길은 천국 가는 길이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삶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인생의 최고 가치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찬양)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내 삶의 이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