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 뿐 아니라 교회에 한 번도 안 다녀본 사람도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다시 듣고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진피터슨의 말을 빌리면 ‘이야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에 맞게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이야기 속에 새로운 경험과 통찰을 가져오면 그 이야기는 그 만큼 더 풍성해져서 신선한 이야기가 되어 다시 우리 삶에 풍성함을 가져다 준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에 킴 선교사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였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다윗이 악당인 골리앗을 무질렀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가 있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스스로 다윗이 되어서 악당을 무찌르는 상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무찌른 대상은 골리앗이 아니고, 불량배 10명과 싸워 거뜬히 이기는 그런 상상이었습니다. 물론 상상 속에서는 항상 제가 이겼습니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용기가 생기고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어른들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전쟁의 긴장감이 가득하고, 특히나도 골리앗과 같은 존재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입니다. 싸움에 대한 준비가 되어 않은 상태에서, 나이도 어리고 특별한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싸우겠다고 하는 다윗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어른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다윗이 아니라 사울왕과 그의 군대처럶 행동하기 쉽습니다. 골리앗이 모욕하는 말을 들으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 무기력 뒤에는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기도해 보지만 부질없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있는 것은 긴 한 숨뿐입니다. 이런 사황이 사십 일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우리 인내가 한계에 다달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시간을 말해줍니다.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시간입니다. 골리앗의 모욕이 분노보다는 두려움으로, 무기력함으로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여’
우리 앞에 놓인 겁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행동합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죽기보다는 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망하는 것보다 성공해 보이는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우리의 본능이 말해주는 것이 정확한지도 모릅니다. 골리앗과 같은 현실에서 도망이 최선의 전략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2.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다윗과 같은 존재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적군을 향해 적어도 분노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은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지는 믿음입니다. 남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믿음입니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관심도 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도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현실이 달라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다윗에게 있고,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 바로 이 겨자씨 같은 믿음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다윗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믿음이지요. 그에게 있는 믿음은 ‘양을 지키기 위해 곰과 사자와 싸우면서 얻은 것’입니다. 일개 목동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삼상 34-37)
다윗에게 생긴 있는 믿음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자와 곰을 무찌른 영웅담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라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경험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들을 하면서 다윗은 믿음으로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열매를 맛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자와 곰은 두려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다윗에게는 믿음이 자라게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허락하신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사자와 곰과 싸울 기회가 없었지만, 곰 사냥을 해 보신 분의 말을 빌리면, 이 일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내 손에 총이 있지만 사냥개의 도움과 곰 전문가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항상 있습니다. 총도 있고, 사냥개도 있고, 곰 전문가도 있지만, 잘못하면 곰이 휘드르는 발을 맞기라도 하면 살점이 날라갈 수 있고, 뼈가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곰과 싸워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봐도 다윗에게는 엄청난 경험이었고, 무엇보다도 이 일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게 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눈여겨 볼 만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기억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곰과 싸우면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야 라고 하면서 뛰어드는 행동은 무모해 보이는 믿음입니다. ‘양 한 마리 잃어버리고 말지’ 하면서 미리 포기해 버릴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살지, 뭘 먹고 살지, 어떻게 하지” 하는 이런 걱정들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긴 밤을 새워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와 사울왕이 견디어야 했던 사십 일처럼, 그렇게 모욕적이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이 보내야 하는 긴 밤입니다.
그런 시간에 필요한 존재가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길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음을 믿는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산이 옮겨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남들이 비웃을 수 있습니다. 사자와 곰을 골리앗과 비교한다고 말입니다. 골리앗은 사자와 곰에 비하면 공룡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에 대한 겨자씨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자나 곰이나 골리앗이 모두 같은 문제일 뿐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런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용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야 골리앗을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생긴 용기는 왕의 사위가 되고, 부귀 영화를 얻고,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기 최면도 아닙니다. 다윗에게 있는 용기는, 우리에게 생겨야 할 용기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3.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다윗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다윗을 비웃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윗을 향해 화를 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28절)’
이것이 믿음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고자 했던 다윗이 감내해야 하는 비난이었습니다. 대단한 용기를 냈는데, 그 용기를 꺽어버릴 수 있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한 일이지만 들리는 말들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런 소리 들어봤어요. 앞으로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전쟁터로 뛰어들때 듣게 되는 말들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에게 이런 비난만 쏟아진 것은 아닙니다. 그를 향한 진심어린 격려와 충고와 실질적인 도움도 있습니다.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다윗에게 경험이 많은 선배들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을 입혔습니다. 또한 놋 투구와 갑옷도 줘서 다윗에게 입게 했습니다. 사울 왕의 칼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사울 왕이 진심으로 다윗을 걱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음마저도 각오하고 있는 다윗을 향한 염려와 사랑인 것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게 준 것들은 모두 멋진 것들입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디자인 된 것입니다. 최첨단 무기와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의 갑옷은 남들이 다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화려함, 멋짐, 영광스러움, 사랑, 충고, 도움. 이런 것들이 사울왕이 다윗에게 준 것들입니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니아다 하고 곧 벗고 (39절)’
용기를 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와 사랑과 조언일 수 있습니다. 전문가의 조언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전문가의 한 마디로 모든 문제가 쉽게 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그렇습니다. 전문가의 조언이 오히려 짐이 될 때도 있습니다. 교회 성장 세미나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각 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의 조언과 걱정도, 사울 왕의 전문성도 다윗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비난 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다윗에게는 짐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것들을 거절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갑옷을 벗어버리고 시냇가에 가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익숙하지 않지만, 몸에 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도 화려한 것을 벗어버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싸움을 하려면, 특히 영적인 싸움을 하려면 우리 몸에 어울리지 않은 것들은 벗어버릴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따뜻한 조언과 전문가들의 지식도 거절해야 하는 용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압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과 칼을 지녔다고 해서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혹시 하는 마음때문에, 그래도 하는 잠시동안의 위안이라도 받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싸우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갑옷과 칼을 버리는 것입니다. 시험 삼아 입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 맞는 것일 수 있으니까요. 사울 왕은 다른 사람보다 덩치가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옷과 칼로 사울 왕처럼 멋지게, 왕처럼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 왕의 경험과 걱정이 오히려 부담이 되고, 위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작았고, 어렸고, 싸움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용기입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이 용기에 어떤 사람들은 비난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은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용기에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 주고, 격려해 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용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조언과 사랑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다윗 손에는 막대기와 시내에서 고른 돌 다섯개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기 위해 사용한 돌멩이는 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골리앗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에게 사울의 갑옷은 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겨자씨 만큼 작은 씨앗입니다. 아니 어쩌면 겨자씨 보다 더 작은 씨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이 있으면 언젠가는 싹을 틔우고 자라서 새들도 쉴 수 있을 만큼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에 우리는 사울의 갑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 어쩌면 초라한 한 모습으로, 골리앗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골리앗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사울의 갑옷은 무엇일까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욕을 당한지 사십 일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40일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40일은 고통의 시간이지만, 또한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그 일의 시작에는 갑옷을 벗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야 몸이 가볍게 됩니다. 더욱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됩니다. 사자와 곰에게서 건지신 하나님이 골리앗에게서 우리를 건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하실까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해 보렴, 내가 너의 삶 속에서 얼마나 너를 지키고 보호해 주었는지 말이야. 남들이 볼 때 사자와 곰처럼 위협적인 상황이 있지 않았니. 네가 소중히 여기는 양 새끼를 물어갈 때도 네가 나를 믿고 그들에게 달려가 싸웠을 때 너를 지켜주지 않았니. 너와 나와의 비밀이 있지 않느냐. 네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 수 있었느냐. 내가 너를 도와줘서 그런 거 아니니. 앞으로도 그럴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그런데 이제 또다른 용기가 필요하구나. 몸이 안 맞는 옷을 벗는 일 말이다. 그리고 다시 나를 믿고 전쟁터로 뛰어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게 믿음이란다’라고 말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7절)’
우리에게 골리앗을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사울의 갑옷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골리앗과 싸울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사울의 갑옷을 벗어버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용기의 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