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러분과 살펴볼 예수님의 비유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도 여러 가지 함축적인 내용들과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비유에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심각한 주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들어 교회에서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지옥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우스개 소리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교회에서 지옥 이야기를 안하니까, 사람들이 욕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서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안하는 것 같아요. 저도 많은 설교를 했지만, 지옥 이야기를 거의 안 했던 것 같습니다. 천국이라는 주제 만큼 지옥이라는 주제도 중요한데 말입니다. 너무 겁을 주는 것 같아서, 또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라서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천국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지만,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을 알려면 지옥을 알아야 하고, 지옥을 알려면 천국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몇 가지 특징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2.
제가 어릴 때, 어머님이 저를 붙잡고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 살아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님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려고 정말 열심히 일하셨던 같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가르침을 열심히 믿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온 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이런 메세지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 믿어서 건강해지고, 예수 믿어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건강하고 또한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반대로 병들고 가난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건강과 부자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하루 이틀 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가난한 거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거지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 땅에서도 번영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반면 거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이 땅에서도 벌을 받고, 죽어서도 지옥에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바리새인도 부자와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부자가 잘 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천국 갈 것 같은 부자는 지옥에, 지옥 갈 것 같은 거지는 천국에 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믿음과는 전허 다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비유를 통해 두 가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부자는 왜 지옥에 갔을까요? 또 거지는 어떻게 천국에 갔을까요? 그런데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살펴볼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어떤 곳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옥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지옥은 고통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지속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거지 나사로가 경험했던 삶이 지옥 같은 것입니다. 가난이 지속되었습니다. 배고픔이 지속되었습니다. 상처가 나서 헐었지만 치료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나사로의 삶에는 고통과 아픔이 가득했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아픔이 가득하고 지속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지옥이 더 무서운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이런 고통과 아픔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증은 있는데 그것이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갈증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달았던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홍콩에 단기 선교를 간 적이 있습니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홍콩 시내를 관광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 무척 더웠는데, 무슨 이유인지 물을 마실 곳이 없었습니다. 갈증이 너무 심해지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오더라구요.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어느 패스트푸드 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음료수 큰 것을 시켜서 허겁지겁 마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여튼 엉청 많이 마셨는데요. 갈증이 해결되지 않으면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지 그 때 배웠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다가 내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부자는 지옥에 있어도 자기 생각 뿐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한 방울의 물이 별거 아니지만,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점입니다. 지옥과 천국 사이가 너무 멀고, 또한 두 곳은 왕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 싶은 사람도 건너갈 수 없고..”
지옥은 갈증은 있지만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되는 곳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지옥 같다는 표현을 쓸 때도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갈증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될 때, 우리의 삶은 지옥과 같이 변해 버립니다. 비유에서 나사로가 살면서 지옥을 경험했던 이유입니다. 나사로가 부자 집에서 원했던 것도 사실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고 배가 불렀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도 채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거지인 나사로를 거들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삶은 더 지옥과 비슷했던 것입니다. 몸이 아파고 배가 고파도, 어느 누구 거들떠 보지 않았던 인생이 바로 나사로의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해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천국은 ‘위로’가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애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천국은 위로가 있고, 지옥은 물 한방울의 위로도 허락되지 않는 곳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우리 삶에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 작은 위로라도 있다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어도 우리에게 갈증을 풀어줄 물이 없다면 괴로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지옥 같다면 느껴지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삶에 ,작은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이 지옥 같다면 그것 또한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 가정이 천국 같다면, 그것은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천국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의 양입니다. 나사로가 바라던 위로도 별 거 아니였습니다. 바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였습니다. 부자가 바라던 위로도, 나사로의 손 끝에 찍힌 물 한 방울이었습니다. 부스러기, 물 한 방울, 품 이런 것들은 별거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매우 의미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천국이 될 수 있는 비결은? 우리 가정이 천국이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바로 ‘위로’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작은 위로’입니다.
배 고픈 사람에게 위로는 밥 한 숟가락입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위로는 헌 옷이라도 따뜻하게 덮어줄 옷입니다. 갈증이 심한 사람에게 위로는 ‘물 한 모금’입니다. 마음의 상처에 필요한 위로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줄 품입니다. 위로는 특별한 누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만큼의 큰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율법도 잘 지켰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만큼은 천국갈 사람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집 앞에 있었던 거지를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 나사로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부스러기로 상징되는 아무 것도 아닌 것도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형제에게 베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도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의 전 재산을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와 같이 작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그것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의 양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만큼의 위로만 있어도 살 것 같습니다. 사는 게 천국 같아집니다. 사는 게 즐겁고 평안해 진다는 것입니다. 혀를 시원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이 지옥도 천국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까요? 힘들고 어려움 속에 있는 그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을까요?
일본 선교사들에게 음식을 한 달에 한 번씩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배달되는 음식을 받고 위로를 많이 받으신다고 가끔 연락을 해 주십니다. 하루는 조심스럽게 이런 질문을 해 왔습니다. 영국에서 초콜렛이 왔는데, 혹시 초코렛을 보내신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초콜렛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면 믿으시겠어요?
하나님께서는 부자의 호화로운 생활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인데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한 가지 요구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였습니다. 나사로가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 그가 위로 받을 수 있었던 위로의 양을 하나님이 부자에게 요구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 일이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부자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거지 나사로를 위로할 기회를 잃어 버렸습니다.
4.
마지막으로 천국은 자기 의로, 조상 잘 만난 탓에 갈 수 있는 곳은 아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특이한 부분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부자는 이름이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에 대상인 거지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자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지만 살 수 있는 존재 였습니다. 반면 부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잘 살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부자에게는 아브라함이 자기 조상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열심, 위대한 조상도, 엄청난 부도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는 곳입니다. 나의 처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부요하든 가난하든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를 도우시고, 위로해 주시며, 높여 주신다는 것이 비유에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천국은 자기 의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우심이 있어야만 갈 수 있는 곳임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 사는 우리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상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우리의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의 양도 어쩌면 작은 것일 수 있습니다.
위로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천국이 되는 비결은 ‘위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작은 위로.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열쇠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듯이, 우리도 어렵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족들을, 교회 식구들을, 위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