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 주의 휴스턴에 큰 홍수가 났습니다. 천 년만에 한 번 있는 홍수라고 합니다. 그만큼 이례적인 규모의 홍수 피해가 났습니다. 백 만명이 홍수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번 홍수로 미국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홍수로 전 세계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많은 분들이 수재민을 돕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개인적으로 성금을 보내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우리 교회도 이번 홍수로 고통 받는 수재민을 도왔으면 좋겠습니다.
뉴스에서 이번 홍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게 인상 깊었던 기사 중 하나는 물 한 병에 99불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위기를 기회 삼아 돈을 벌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사 제목만 보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어떤 가게는 수재민을 돕기 위해, 생필수품 가격을 많이 낮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려울 때 돕겠다는 의지가 읽혀져서 좋았습니다.
홍수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두 기사의 차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배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가게와 그렇지 않은 가게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려움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정상이 되면 사람들은 어려울 때 자신들을 배려해 준 그 가게로 갈 것입니다. 그 가게에 대한 믿음이 더 굳세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겠지요? 작은 배려가 믿음을 굳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서로 배려하면서, 어려울 때 도우면서 말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을 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배운 내용도 ‘배려가 믿음을 굳세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메시지를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사전에서 ‘배려’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 또는 상대방을 위해 편의를 제공하거나 실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나무 위키라는 웹사이트는 ‘배려라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아픔에 민감하게 공감하는 능력이 요구된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배려가 그 만큼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필요한 것이 배려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배려해 주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세질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는 잘 못한 것 같네요. 아내는 잘 하는데, 남편인 저는 아직도 제 생각만 할 때가 많으니 말입니다. 직장에서도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러면 회사 생활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신앙 생활에서도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과 디모데의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배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생각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그것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절)”
바울과 디모데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는 주님의 은혜가 강조되지만, 사도행전 15장으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강조하면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종이 한 장 차이도 안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기도 합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자, 일부 유대인들이 이렇게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희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행 15:1)’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오랫동안 논쟁을 하게 되고, 다음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구원과 할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생각해서 몇 가지 지켜야 할 지침을 이방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 (행 15:20).”
종교적인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를 사도들과 장로들이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실 디모데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요.
여기서 잠시 디모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영적인 아들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에서 전도를 할 때 예수를 믿게 된 것 같습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디모데 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믿음이 디모데에게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대의 진실한 믿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대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었니, 그대에게도 이 믿음이 있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딤후 1:5)’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디모데’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저도 이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주여, 우리의 자녀들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이어가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주님의 축복의 그늘 아래 있기를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인지 디모데에 평가가 좋았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루스드라에 뿐 아니라, 30km 떨어진 이고니온 신도들에게도 디모데는 호평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와 전도 여행을 떠나라고 하니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지요. 바로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입니다. 디모데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의 권면대로 라면 디모데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디모데로 바울의 행동에 크게 반발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 혹시 있을 수 있는 할례와 관련된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해야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사소한 것으로 힘 쓸 시간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사소한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정말 중요한 예식이지만,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에게는 사소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입니다. 디모데는 앞으로 목회자로 그 지방에 살게 될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작은 배려를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바울의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9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19: 1,19,20)”
바울과 디모데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핵심 단어는 “사람을 얻으려고”입니다.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실천한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읽어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중국 사람처럼 옷을 입고, 중국 사람처럼 생활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우리 나라 사람처럼 옷을 입고, 우리나라 사람처럼 음식을 먹었습니다. 자유롭지만 스스로 종이 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할례를 받거나 그렇지 않거나 디모데에게는 별 차이가 없지만, 앞으로 만날 사람들, 그리고 그가 아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 나온 행동인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과 디모데의 배려로 일어난 사실이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우리의 작은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희생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변론보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배려가 다른 사람의 믿음에 도움이 되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우리의 행위로 다른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된다면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배려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교회도 더욱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배려가 믿음을 굳세게 한다는 것은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던 마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라고 하는 요한’ 때문에 심하게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곳으로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각각 자신들의 고향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는데요. 이를 통해 선교의 열매가 배가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마가를 향한 바나바의 배려는 마가의 믿음을 또한 굳세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서로의 믿음이 굳세어지기는 은혜가 우리 공동체 안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우리 공동체 안에도 믿음이 더욱 굳세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수고하고 기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