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중요한 의식이 있는데요. 바로 세례와 성찬식이지요. 이 중에서 오늘은 세례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컴벌랜드 장로교의 신앙 고백서를 보면, 물 세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 세례는 성령 세례의 표시거나 상징이다. 세례는 사람에게 물을 붓거나 뿌리는 의식이며, 어떤 형태로 세례 의식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컴벌랜드 교회는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예식 또는 사람의 머리에게 물을 붓는 예식, 모두 다 세례 의식으로 사용합니다. 즉 세례를 베푸는 예식보다는, 세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의 의미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설교하자,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데요. 이것은 물 세례가 고백한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세례는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세례가 있다는 것을 세례 요한의 말 속에서 알 수 있는데요.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마 1:7-8)” 주의 길을 평탄하게 하는 일을 사명을 가진 세례 요한이 베푸는 물 세례는 하나의 의식이지만,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는 실제로 죄씻음을 주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말라기 3장 1-3절을 읽어보면, 세례 요한의 역할과 함께 세례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집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말 3:1)”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입니다.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3절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예언 부분입니다.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말 3:3). 세례 요한이 예비한 주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의 의미도 알 수 있습니다. 물 세례는 죄 씻음에 대한 의식이지만, 성령 세례는 실제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 세례도 받아야 하지만,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강하게 임했습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에도, 성령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셨고, 사람들의 죄를 실제로 씻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 뿐 아니라, 현재의 죄, 그리고 우리가 지을 미래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기도하기는, 이 시간 이 곳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짓누르고 있는 무겁디 무거운 죄의 사슬이 벗어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의 죄를 실제로 깨끗하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11)”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사 (디도서 3:5-6)”.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전 12:13).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가복음 16:16)”.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 세례 받는 것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시기로 결심하신 여러분은 예배당만 드나드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으로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이 말씀이 오늘 이 곳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신 이유
오늘 읽은 본문에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요한 앞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세례는 자신이 죄인이며, 고백한 죄를 흐르는 물에 씻어 버려야 살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은 당연히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 올랐습니다.
한 여고생이 암에 걸렸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머리가 다 빠져 버렸습니다. 한참 외모에 예민해 있을 나이가 여고생 시절인데요. 암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고생은 사람 만나는 것 자체가 싫어졌습니다. 그런 그에게 친구들이 병문 안을 왔습니다. 병원을 찾아온 친구들은 한결같이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진 친구의 속상함을 달래주려고, 병문안 온 친구들이 머리카락을 모두 깍아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친구 있으세요? 어려움에 빠진 친구를 배려해 주는 친구 말입니다. 머리를 자른 친구들이 항암 치료를 받는 친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걸까요? ‘머리카락이 없어도, 우리는 친구다’ 라는 메세지이지요. 머리카락 빠진 것 때문에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처럼 고생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힘내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항암 치료를 받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항암 치료를 받아서 머리가 빠진 친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자른 그의 친구들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처럼, 세례를 받으며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물 세례를 받으신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이 하고 있는 사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이상한 옷과 허접한 음식을 먹으면서 목이 쇠어라 소리치는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옳다, 잘하고 있다’ 라고 예수님이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4)”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그의 사역을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지원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다면, 죄 많은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으셨으면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시길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요 1:29) 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진 속죄물로써,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오만한 자라고 평가했을 것입니다. ‘지가 뭔데 세례도 안 받아?’ 라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 않으시길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보다 낮은 위치로 내려가심으로, 몸소 겸손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받을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고, 겸손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낮추면 높여주신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죄인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께 내려왔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11)’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처럼 스스로 낮추시고 비천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인데요. 예전에 어떤 분이 겸손해지려면, 먼저 높아져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셨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높아진 사람만 겸손할 수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겸손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덕목입니다. 또한 사람이 높아지면 겸손해야 하는데, 그럴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지식으로 잘 알고 있지만, 삶 속에서 겸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가 깨달은 겸손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겸손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겸손은 ‘기꺼이 자기 손을 더럽히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을 기꺼이 더럽힌다면, 우리는 “겸손하다” 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요즘 말로 하면 종교적인 스타였습니다. 연애인만 스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계에도 스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하고, 그가 하는 일에 주목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쯤은 만나고 싶어했고, 그의 설교를 사람들이 계속 듣고 싶어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 이름이 생기면, 사람은 우쭐거릴 수 있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검소하게 살면서, 자기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 ‘ 나 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사진). 화면으로 보여드리는 신발과 비슷할 것 같은데요.
이 당시의 신에는 끈이 달려 있는데요. 신을 벗으려면 끈을 먼저 풀어야 하는데, 이것을 해 주던 사람들은 종이었습니다. 왜 종이 하나요? 손이 더러워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손이 더러워지는 일을 하는 것은, 비천한 사람들이 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그런 인식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 일마저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면서 자신을 낮추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계 스타였던 세례 요한이 무명에 가까운 예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의 이런 자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 겸손은 자기의 손이 더럽혀지는 것을 꺼리지 않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 (마 11:29a)’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 죄인의 자리에 앉으시고, 세례를 받으신 것들이 겸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지요. 또 한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입니다. 이 당시 발을 씻어 주었던 사람은 ‘종’이었지요. 종이 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나요? 손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지요. 제자들도 스승의 발을 씻어주지 않았는데, 스승인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더럽히셨지요. 겸손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2)’ 우리가 낮추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낮아짐은 우리의 손을 기꺼이 더럽히는 것입니다.
손이 더러워질 필요가 없는데, 스스로 손을 더럽힐 수 있는 사람들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겸손한 자가 되십시오. 저도 겸손한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교회는 겸손을 훈련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는 곳이 교회 아닌가요?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교회 아닌가요? 신앙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먼저 보여주실 것이 있지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손을 더럽히는 모습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 드려야 할 것도, 기꺼이 제 손을 더럽히는 모습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을까요?
교회 바닥에 떨어진 휴지 줍는 일은 어떤가요? 남들이 먹은 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일은 어떨까요? 교회는 삶이 힘든 사람들, 굶주리고 아픈 사람들을 돕는 곳이지요. 그런데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더러워진 손은 흐르는 물에 씼으면 그만입니다.
성숙한 교회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교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추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