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들이 또는 유다의 왕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어떠했다는 구절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이들 왕들에 대한 평가가 한결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읽으신 성경에는, 이스라엘 왕인 여로보암이 그랬고, 유다의 왕인 르호보암이 그랬습니다. 유다의 왕 아비얌의 경우는 더욱 처참합니다.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다 (열상 15:3)’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유다와 이스라엘은 분열과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록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일주일 동안 읽었던 내용 중에, 그래도 반가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왕의 이름이 거론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왕 아사는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비얌 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사 왕이 했던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냈습니다.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앴습니다.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어머니를 폐위시켰습니다. 아사 왕은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했던 사람이라고 평가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구별해서 드렸습니다.
이런 아사 왕의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가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아사 왕 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맞지요? 제 말이 맞았으면 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곳에 모인 그 자체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려고 모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일까요? 생각을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천국 소망을 품은 사람처럼 사는 것일까” 고민하는 사람이 우리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을 잊고 살 수는 있지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모인 이들이 우리입니다. 세상만 바라보다 살던 우리가, 주일에 모여 예배하면서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하려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아사 왕의 이야기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가 아사 왕이라, 오늘 본문이 반가운 것입니다. 연약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아사 왕처럼 우리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요?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시선은 우리가 이룬 업적, 우리가 이룬 부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 통장에 있는 잔고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바라고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아사 왕처럼, 다윗 왕처럼,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물론 아사 왕이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많이 다르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적용해 볼 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나온 책인데,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책 중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이 질문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지 신경 씁니다. 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보겠다는 마음의 자세와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사람하면 떠 오르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갔던 요셉은, 보디발의 처가 유혹하며 동침하기를 요구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 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 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8-9)’
유혹을 거절한 댓가로, 요셉은 고난을 당했지만,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결심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당장 손해보더라도, 지금 당장은 욕을 먹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고민해 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걸어간 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김창옥 이라는 분이 쓰신 책의 제목이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산 것처럼 앞으로도 살 것인가?’
살아온 인생이 후회함이 없으면, 예라고 대답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반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후회스럽다면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사 왕은 예전 왕들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아사 왕은 자기 아버지 아비얌이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삶입니다. 종교 개혁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개혁의 시작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12절에 표현된 남색하는 자는, 새번역에 ‘성전 남창들’로 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즐거움 대신 육체적인 쾌락이 판치는 곳으로 성전이 변질되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사 왕은 이 일을 바로 잡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누룩을, 또는 세상의 때를 제거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들을 제거하는 것이, 개혁의 시작입니다. 이런 일들은 극한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랜 습관이고, 관행이었던 일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고치기 어렵다고 포기하기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요 사이 배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길 바닥에 때를 벗겨내려면 높은 수압이 있어야 합니다. 파워 워셔로 길을 청소하면서 배운 것입니다. 묵은 때를 벗겨내는 일은 그렇게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힘든 만큼 깨끗해진 길을 보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죄를 제거하는 즐거움. 우리 삶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는 즐거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아사 왕이 성전의 묵은 때인 남창과 우상을 제거하자, 그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축복은 평안이었습니다. 역대하 14:6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죄의 묵은 때를 제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이 평안이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감이 잘 오지 않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고아원 사역을 했던 조지 뮬러입니다. 죠지 물러는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만 구하고, 사람들에게는 구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게 가능할까 싶은데, 이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조지 뮬러입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사람들이 도와줄 것이 있냐고 물으면 조지 물러는 그들에게 기도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후원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조지 물러는 고아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 하면 떠 오르는 성경 인물 중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그를 향해 돌진해 나갔습니다. 그에게 그런 용기가 생긴 것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기의 힘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나오는 아사 왕도, 어려움 중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습니다. 역대하 14장 8절에 보면, 아사에게는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유다 출신 군인 삼십만과 작은 방패와 활로 무장한 베냐민 출신 군인 이십 팔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용감한 정예병이었습니다. 아사 왕에게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절에 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에티오피아 사람 세라가 유다를 치려고 백만 대군에 병거 삼백 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아사 왕에게 벅찬 일이었고 또한 두려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자기 군대보다 두 배가 넘는 막강한 군대가 쳐들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일 겁니다. 그 때, 아사 왕은 주 그의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아사 왕이 한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데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 후에, 아사 왕은 전쟁을 피하지 않고 담대히 적군을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주님께 자신의 약점을 아뢰고, 그러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어려움, 우리가 맞이하는 곤란한 상황은, 우리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기회라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을 경험하냐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겁니다.
누군가를 의지하기 위해서는 힘을 빼야 합니다. 김창옥 님의 책에 보면 내 힘을 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용의 일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힘든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몸에 잔뜩 힘을 줍니다. 내 뒤로 마지노선이 없다고 느껴질 때, 내 뒤에 절벽이 있다고 생각될 때 온 몸에 힘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온 몸에 힘을 주면 어떻게 될까요? …더 크게 다친다는 겁니다”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습니다. 몸에 별로 힘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른들은 그냥 넘어진 것 뿐인데, 인대가 늘어나고 뻐에 금이 가고 심하며 다리가 부러지도 한다고 합니다. 몸에 힘을 주고 살기 때문에 넘어지면 세게 다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움이 찾아올 때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힘을 빼는 방법 중에 하나는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우리 힘을 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뒷 배경이 되어 주신다. 우리가 떨어질 때 우리를 받아주시는 분이 있다”
이것을 알면 힘을 뺄 수 있습니다.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가 했던 일도 자기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했던 일도 자기 힘을 뺀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나아간 결과가 승리였던 것입니다. 아사 왕도 에티오피아 군대를, 그것도 100만이나 되는 군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신가요? 눈을 감고 기도해 보세요. ‘주님, 도와 주세요’ 주님 도와 주세요. 이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훈련인 것입니다. 놓아야 할 때, 쉬어야 할 때, 힘을 빼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는 법은 ‘우리 몸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일어난 일이, 역대하 14장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구스 사람은 에티오피아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 아사 왕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러면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쳐서 이기게 하셨다’는 간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던 아사 왕도, 나이가 들면서 하나님 보다는 사람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으로 삼십육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왕 바이사가 쳐들어 옵니다. 그 때 아사는 성전의 창고와 왕실 창고의 모든 은과 금을 모아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시라아의 벤하닷 왕에게 보내서 도움을 청합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 보이시지요?
젊을 때 아사 왕과 다른 점은 그가 자기 몸에서 힘을 빼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던 은과 금 거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금과 은으로 대표되는 힘 자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나중에 하나님이 선지자 하나니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역대하 14:7)’
그리고 이어지는 경고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 즉 이 후 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역대하 14:9)’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과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의 차이는 ‘기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몸에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주님께 아뢰시길 바랍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주님을 의지합니다.”이 기도가 우리 공동체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의 힘을 빼야지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집중하지 않고, 몸에 힘을 빼고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려울 때 주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아사 왕이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승리였고 평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이 온 힘을 다해 사람을 의지하고, 자기 힘을 과시했을 때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문책과 전쟁이었습니다.
역대하 14장 12절에는 나오는 슬픈 기록이 있습니다. ‘아사는 왕이 된 지 39년이 되는 해, 발에 심한 병이 들었으나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의사에게만 의존하였다’ 그렇게 아사 왕은 의사만을 의지하다가, 2년 후에 죽게 됩니다.
어려울 때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런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