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 동안, 초대 교회가 생기고 나서 어떤 일들이 일어 났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한 마디로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성도간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핍박이 왔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온 땅에 퍼져 나갔습니다. 교회를 핍박 하던 바울이 회심하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방인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을 먹어도 됩니다. 주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항상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참 자유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자기는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술도 정말 가끔 먹는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도 먹고 싶다.왜냐하면 의사가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의사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너무 하고 싶다. 따라서 자기에게 뭐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 그러면 자기는 그걸 그렇게 하고 싶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댓글을 달려고 하다가 꾹 참았습니다.
‘기도하지 마라. 절대로 기도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하지 말고, 감사하지 말고, 기뻐하지 마라’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거꾸로 하고 싶어할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로움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자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자유 말입니다. 그런 자유를 우리가 누리게 되기를 배웁니다.
초대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워 갔습니다. 특히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는 말씀의 의미 말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 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는지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심히 다툰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교회의 기둥 같은 두 사람이 심히 다투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가슴 아픈 이야기로 들립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면서 이런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주님, 무슨 메시지를 전해야 할까요? 싸우지 맙시다. 교회에서 싸우면 안됩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해야 하나요?
그래서 참 고민되는 본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사건일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잠 들고, 기도하다가 잠이 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 도대체 이 이야기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까?’ 심히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주님이 깨우쳐 주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다시 보게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흥미로워하고 신나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닐까 한느 생각도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싸운 이야기는 싫어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선교하다가 생긴 일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생긴 일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화평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싸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더욱 흥미 진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본문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싸운 것도 아닙니다. 서로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하려다가 싸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은 두 사람이 다툰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이 심히 다투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한 사람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마가라고 하는 요한입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인 것 처럼 말입니다.
사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툴 사람들이 아닙니다. 둘 다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신실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욕심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은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헌금했고, 주를 위해 선교사로 불편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어떤가요? 그는 교회를 핍박하다가 주님을 만나 주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하시는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영적인 거인들이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것도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한 사람을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 하면서 다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헤어지게 만든 마가라고 하는 요한은 누구인가요? 주님이 이 사람을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와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집안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마가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했던 장소도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태어난 곳도 마가의 집입니다. 즉 주를 믿는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했던 곳이, 또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던 집이 바로 마가의 집입니다. 마가라고 하는 요한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마가는 현대 교회의 성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가는 경제적으로는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영적으로는 사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는 축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유하고 믿음이 좋고, 온 가정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멋진 크리스챤의 모습이 마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두고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었습니다. 그것도 그를 선교 여행에 데리고 가야 할지를 두고 말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마가’입니다. 마가는 지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가를 선교 여행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 3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이 그들과 함께 계속 일하지 않고 떠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데려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일은 사도행전 13장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마가 요한은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에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함께 왔던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일은 바울에게 마가가 어떤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 같습니다. 바울에게 함께 일하면 안될 사람이 바로 마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남아있는 마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과 인식이 무척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바울이 선교의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이런 평가가 마가에게 얼마나 충격이었을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가가 존경한느 사람에게 들었던 평가라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같이 일할 수 없는 사람! 신뢰할 수 없는 사람! 믿지 못할 사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
이것이 마가를 향한 바울의 평가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가가 얼마나 놀라고 슬펐을까요? 마가가 이 일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마가는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던 같아요. 이 후에 마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의 버림을 받은 사람인 마가. 바울의 신임을 잃어버린 마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3.
마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마가복음’의 저자입니다.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베드로에게 들었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글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가 믿음의 거장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중에 보면 마가는 바울의 신임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바울이 힘들고 외로울 때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9-11절 말씀입니다.
‘되도록 빨리 내게 와 주었으면 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떠나고, 디도도 달마디아로 가 버렸습니다. 누가 만이 내 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대가 올때, 마가도 같이 데려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힘들고 외로울 때, 의지하고 싶은 존재로 마가가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나바가 옳았습니다. 비록 실수했지만 마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바나바가 옳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마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주님께 귀하게 사용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 졌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이 마가를 결정적으로 바꿔 놓은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툰 이야기를 통해 마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마가는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시던 밤에 예수를 뒤 따라 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는데, 잡혀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있는 것 같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자, 잡힐 것이 무서워서 자신이 두르고 있던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벌거숭이로 도망을 쳤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14장 50-52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갔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맨 몸에 흩이불을 걸친 채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흩이불을 벗어 던진 채, 벌거벗고 도망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젊은 사람은 마가를 의미합니다. 마가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군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용기가 있는 것 같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벌거벗고 도망가기 바쁜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했던 1차 선교 여행에서도 마가는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흩이불을 벗어 던진채 벌거벗고 도망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당시는 잠시 부끄웠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금방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를 아시지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고 사기를 당한 임금님을 향해 아이들이 깔깔거리면 말하지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말입니다.
마가에게 있었던 그렇게 충격적인 사건, 바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깨달은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인 두 사도가 자신 때문에 심히 다투는 장면을 보면서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너 자신을 봐라!’ 라고 말입니다.
너의 모습이 부끄러운 것인지 보라는 것입니다. 벌거벗고 달아났던 마가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닫게 된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록 다투었지만, 이 일은 결국 마가를 살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교의 열매가 두 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라라는 지도자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각 교회는 이들을 통해 더욱 힘을 얻고 강해졌습니다.
4.
사도들이 다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에서 사역자들이 심히 다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다툴 때, 그 일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열매 맺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위기 같은데 기회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있는 분쟁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 사역자들이 자기 욕심을 위해 싸우면 교회가 어렵게 되지만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 이후에도 서로를 존경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 중심의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바울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바나바는 사람 중심입니다. 마가가 실수하지만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또 다시 기회를 준 사람입니다. 즉, 바나바는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 중심인가요? 사람 중심인가요? 우리는 성과 중심인가요? 과정 중심인가요? 우리가 기도하고 지혜를 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마가는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주님은 어떤 사건들을 통해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멋진 크리스챤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나는 멋지고 착한 남편이다’ ‘나는 멋진 아내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 분명히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가장 충격적이고, 수치스러운 순간일 수 있습니다. 수치를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숨어 버리나요? 아니면 마가처럼 자신의 수치를 들어내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기회로 삼으시나요?
마가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드러날 때, 우리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질 때 우리는 당황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일도 주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세요. 우리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그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가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가가 평생 잊지 못하고, 설교 때마다 했을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일까요?
자신을 변화시킨 이야기, 자신을 충격에 빠뜨린 이야기 아닐까요?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두 사도가 심히 다투더라! 그리고 마가는 벌거벗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 일이 분명 마가를 변화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에게 이 일은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은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오라는 메시지 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새겨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