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추수감사절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오늘은, 한 해 동안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시편에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영화롭게 하나니 (시편 50:23)’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감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모두가 잠시 동안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어떤 것이 감사할까 생각해 봤는데요. 이런 감사제목들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감사하고, 어떤 일이 마무리 된 것 같아 감사하고, 휴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고,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형제들이 있어서 감사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사랑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사랑 받아서 감사합니다. 깨끗한 물과 공기도 감사하고, 풍성한 음식도 감사합니다. ..”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 제목입니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도다’ 주님을 향한 감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한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삶이 풍성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을 받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제가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번 여러분과 나눈 내용이기도 합니다.
한 해를 잘 마무리 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해가 감사한, 일 년이 됩니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우리의 인생이 감사한 인생이 됩니다.
추수 감사절이기 때문에 억지로 짜 내듯이 하는 감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하루 뿐 아니라, 매일 매일이 감사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추수감사절은 어떤 날인가 생각해 봤더니, 추수 감사절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청교도들이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식량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때 인디언들이 도움을 줬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 희망이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했던 날이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니까, 추수감사절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날이기도 합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우리의 작은 선행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 나눈 내용인데요.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흘 밤낮을 굶은 한 소년을 구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소년은 아멜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병들어서 버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인생이 처참하게 망가졌던, 그리고 병들어 버려지면서 더욱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였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그를 살려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일이 별 것 아닌 듯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알게 되면 특별하다는 것도 알 게 됩니다. 지금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그들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멜렉 족속이 그들의 가족들을 잡아갔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절망했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사람이 죽어가는 소년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죽어가던 그 소년을 살릴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평안해서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그 소년을 살린 것이 아니기에 특별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다윗은 아멜렉의 본거지를 알게 됩니다. 죽어가던 소년이 아멜렉의 종이었고, 그가 자신을 살려준 다윗에게, 자기를 버린 아말렉 사람의 본거지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니다. 이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무사히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망 가운데 있던 다윗이었지만, 절망하는 한 사람을 살렸더니 그도 살고 자기도 살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사건인데, 그 일이 작은 선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일은 다윗의 기도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아멜렉을 쫒아가서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기를 기도했고, 그 기도가 응답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죽어가는 애굽 소년’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절망의 밤에 다윗처럼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때 만난 절망 가운데 있는 그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이야기인 것입니다.
절망의 밤에 기도하십시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과 분노가 우리를 감쌀 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우리를 감싸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누군가의 절망이 희망으로, 절망과 슬픔이 소망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날이,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3.
그런데 너무 상실감이 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기도 합니다. 다윗처럼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금방 응답하시고 길을 알려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이 그랬습니다. 아시다시피, 욥은 큰 절망 가운데 빠진 상태였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자녀를 잃었습니다. 전 재산을 잃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기에 욥은 자기 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소리지릅니다. 친구 세 명은 이 모든 일이 죄 때문이라고, 회개하라고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든데 더욱 절망 가운데 빠지도록 만드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기도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밤이 깊은데 별 빛도 없는 그런 밤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깊은 절망 속에 빠진 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욥의 친구들이 쏟아내는 주옥같은 설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무고하게 고통 받는 욥에게, 그들은 설교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옳은 말인데, 맞는 말인데, 그 말이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큰 슬픔과 절망에 빠진 이를 위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아무 말 없이 안아주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일, 그리고 함께 울어주고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절망스러운 밤에 아침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절망을 나무와 비교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무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희망이냐 하면,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그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난다는 희망입니다.
‘비록 그 뿌리가 땅 속에서 늙어서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게 된다’는 희망입니다. 나무가 찍혀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으로 죽은 것 같지만,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이자 희망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나무에 비해, 욥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자조가 섞인 말인 것입니다. ‘나무는 희망이 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이 말라 버린 강처럼, 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절망하는 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욥이 나무는 희망이 있다고 하면서 그는 자꾸만 절망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그는 자꾸만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찍힌 나무 같지만, 그 나무의 뿌리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나 자신을 보면 더 절망스럽지만, 나무에게 희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사흘낮밤을 굶어 버린 병든 애굽 소년 같고, 상실의 고통이 너무 커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힌 욥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아멜렉 족속에게 가족을 빼앗긴 다윗과 그의 부하들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초점을 맞추면 더 절망하는 것입니다. 찍힌 나무 같은 현실이지만, 나무는 희망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나무를 지으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욱 큰 절망인 것입니다.
찍힌 나무도 희망이 있습니다.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연한 순이 나와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뿌리도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면 연한 가지가 나와서 가지가 자라게 될 것이니다.
추수감사절은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이라는 꽃을 보는 날입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도 절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공포가 얼마나 컸던 지, 그들이 울 기력도 없었다고 표현되어 있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절망 속에서 다윗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 응답은 다 죽어가는 한 소년과의 만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소년을 보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시급하고 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제촉하였더라면, 아마도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아멜렉 족속에게 납치된 여인들을 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죽어가는 소년을 살렸습니다. 절망 속에 있었던 그들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작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추수감사절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작동해야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청교도들에게 토착민 인디언들이 베풀어 주었던 긍휼이, 그들을 희망으로 이끈 것 아닌가요?
세상을 이끄는 힘은 ‘긍휼’에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누군가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찍힌 나무 같은 우리를, 사흘밤낮 굻어 죽게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찍힌 나무도 희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힌 나무의 희망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보았으면 합니다.
물이 말라 버린 강가와 같고, 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되어도, 정말 희망이 없고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는 지경이 되어도, 찍힌 나무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절망스러운 우리도 살리신다는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4.
욥의 고백처럼 우리의 인생은 짧고 걱정이 가득합니다.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인생이 허망하고 허무할 따름입니다.
어떤 분이 어머니 건강이 나빠져서 요양원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어머니도 상황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지만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사실이, 그 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요양원에서 보게 된 것들도 그 분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요양원에서 본 것은 이런 것입니다. 노인들의 주름살과 보행기, 휄체어, 틀니였습니다. 요양원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분이 요양원을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의 건강과 기억력이 조금씩 나빠져서 더 우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요양원에 계신 노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든 일곱이신 어떤 할머니는 점심시간이 되면 건강이 나쁜 그 분의 어머니 곁에 앉아서 음식 먹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여든이 된 어떤 할머니는 관절염으로 두 무릎이 성치 않았지만, 아침마다 자원해서 커피를 얼심히 따라 주셨다고 합니다.
이게 보이자, 이 분이 희망을 보았다고 합니다. 찍힌 나무 같은 그곳에서, 사랑과 용기와 변함없는 사랑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무도 희망이 있지만,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망이 있다, 희망이 있다는 말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그 동안 잘 안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무도 희망이 있는데,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잊어 버렸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해 줘야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절망 중에 있을 때, 절망하면서 한 말이지만,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보길 기도합니다. 찍힌 나무를 보고도, 보이지 않는 나무 뿌리에 희망을 노래했던 욥처럼, 자신도 찍힌 나무 같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하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여러분의 마음에 수 백 가지 감사제목이 떠 오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워서, 여러 가지 이유로 절망 가운데 있으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그 분들에게 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찍힌 나무 같은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을 힘입어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욥의 친구들을 통해 보았던 것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하는 우를 범치않게 되었으면 합니다.
대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주님이 주시는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추수 감사절 아침에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온 세상이, 전쟁으로, 기아로, 전염병으로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살아갈 희망이 생기기를, 희망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희망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살 희망이 생기게 한 날이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살 소망입니다.
이를 감사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