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것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믿음의 여정이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믿음이 있을까요?
여기에 모인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습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과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영이 새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우심을 믿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믿습니다. 제가 열거한 것 말고도 우리는 많은 것을 진리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믿음의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담대하게 또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이야기를 빼고는 우리 인생이 설명되지 않게 됩니다.
모두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계심을 믿으며 느끼며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들은 정말로 대단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셨으며, 지금도 우주를 운행하고 계신다고 믿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봄에 핀 예쁜 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발견하는 사람들도 대단한 것입니다.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보면서, 간난아이가 태어나 자라서 의젓한 아이로, 성인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켜지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같은 사실을 보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느끼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 중에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
다윗은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눈이 있었으면 합니다. 저는 다윗의 이 찬양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우리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현실을 해석하는 눈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우리 인생 여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예가 오늘 본문일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는 가나안 정탐을 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가나안 정탐을 했던 사람들은 모세가 명한대로 사십 일동안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들을 보고했습니다. 정탐 결과 보고는 13장 27절-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이는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가에 거주하더이다 (민 13:27-29)’
정탐한 사람들의 보고는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첫번째 해석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는 것이었고,
두번째 해석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첫번째 해석은 두 명이 내 놓은 것이고, 두 번째 해석은 열 명이 내 놓은 해석이었습니다.
민주주의 발달한 현대에서는, 누구의 해석을 따르는 게 맞을까요?
다수의 의견인 두 번째 해석입니다. 사실을 정확히 보고 판단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의견은 통계적으로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첫번째 의견은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이 낮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소수의 의견이지만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선동가 갈렙을 따를 것인가? 다수의 의견을 따를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다른 해석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달라서 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해석하게 되는데, 그 해석은 믿음에 따라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은 ‘우리의 먹이’로, 우리의 밥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반면 다수로 표현된 사람의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신의 판단입니다.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거인족과 싸워서 이길 수 잆다는 현실이고 정확한 진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은 것은 현실의 불확실성이 확실하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미 13:32-33)’
다수는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전쟁을 시작하면 질 게 뻔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메뚜기 같이 별 별일 없는 자들이라고 자기 자신을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리고 있는 결론 중에는 그들의 상상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도 독심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상상력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 또한 다수가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다수는 자신이 본 것을 보고했을 뿐 아니라, 악평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평은 사람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다수의 의견을 듣고 슬퍼했는지가, 민수기 14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그리고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의 내용을 들어보면, 모두 다 상상력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 14:2,3)’
고생 고생 하면서 왔는데 역시 그러면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겁 먹고,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애굽이 낫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서 싸움 하는 것보다, 애굽에서 종 살이 하는게 편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수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고백입니다. 또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확실한 일들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히리니..’ 얼마나 큰 믿음인 지 모릅니다. 현실을 보고 내린 정확한 결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경제를 봐도, 세계 정세를 봐도,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봐도, 망하는 것 밖에 없다, 죽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종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수의 의견이라고 말합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어디로 가기로 결정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말합니다.
‘돌아가자’ 더 늦게 전에 돌아가자. 망하기 전에 돌아가자. 이렇게 서로 서로를 설득합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위로를 받습니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믿음일 것입니다.
돌아가면 나을 것이다는 믿음. 돌아가면 칼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돌아가면 애굽 사람들이 환영해 줄 것이라는 믿음. 돌아가면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고기와 밥은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자명합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인생을 가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이 달라집니다. 믿음에 따라 광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라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믿음에 따라 가나안 땅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믿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아니, 어떤 믿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확실한 일들을 상상하면서, 그 일로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선택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력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면 그 약속대로 될까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다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보다는 자신들의 상상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요?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요? 깜깜한 밤 같지 않나요?
폭풍이 불어오는 날 같을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왜 이렇게 해석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이 주신 약속보다 우리의 경험과 다수의 의견과 우리의 상상력을 더 믿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4.
이런 다수의 의견과는 달리, 전혀 다른 생각을 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8,9)’
모든 사람이 인정한 것은 ‘가나안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메꾸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잘 것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보다는 자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짜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점은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인해 보고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리라. 그 땅을 주시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지 확인해 보자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한 번은 해 보자는 것 아닌가요?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향해 진군하기에는 메꾸기 같이 초래하고 힘이 없나요? 맞는 말입니다. 메꾸기라고 생각하면 메꾸기가 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했으면 합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세상은 우리 밥입니다. 우리도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에게도 가나안 땅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땅이 ‘가나안 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보고, 다수의 의견을 따라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 다시 한 번 기도해 봐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 일이 우리의 현실만을 본 결정이었다면 말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면 말입니다. 미리 포기 하지 말라고, 미리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짜피 죽을 목숨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대로 살다가 죽었으면 합니다.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어짜피 죽습니다.
애굽에 가도 죽고, 광야에 가도 죽고, 가나안에 남아서 싸워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진해 보자는 것입니다. 멤피스 한인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이렇게 믿고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죽기 전까지 믿음의 상상력을 살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 믿음의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붙잡고 그 믿음대로 살았으면 합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믿음대로 살았으면 합니다. 1.
우리는 많은 것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믿음의 여정이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믿음이 있을까요?
여기에 모인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습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과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영이 새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우심을 믿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믿습니다. 제가 열거한 것 말고도 우리는 많은 것을 진리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믿음의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담대하게 또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이야기를 빼고는 우리 인생이 설명되지 않게 됩니다. 모두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계심을 믿으며 느끼며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들은 정말로 대단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셨으며, 지금도 우주를 운행하고 계신다고 믿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봄에 핀 예쁜 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발견하는 사람들도 대단한 것입니다.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보면서, 갓난아이가태어나 자라서 의젓한 아이로, 성인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켜지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같은 사실을 보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느끼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 중에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
다윗은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눈이 있었으면 합니다. 저는 다윗의 이 찬양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우리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현실을 해석하는 눈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우리 인생 여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예가 오늘 본문일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는 가나안 정탐을 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가나안 정탐을 했던 사람들은 모세가 명한대로 사십 일동안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들을 보고했습니다. 정탐 결과 보고는 13장 27절-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이는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가에 거주하더이다 (민 13:27-29)’
정탐한 사람들의 보고는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첫 번째해석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해석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첫 번째해석은 두 명이 내 놓은 것이고, 두 번째 해석은 열 명이 내 놓은 해석이었습니다.
민주주의 발달한 현대에서는, 누구의 해석을 따르는 게 맞을까요?
다수의 의견인 두 번째 해석입니다. 사실을 정확히 보고 판단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의견은 통계적으로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첫번째 의견은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이 낮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소수의 의견이지만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선동가 갈렙을 따를 것인가? 다수의 의견을 따를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다른 해석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달라서 입니다. 우리 인생은 해석이 되는데, 그 해석은 믿음에 따라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은 ‘우리의 먹이’로, 우리의 밥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반면 다수로 표현된 사람의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신의 판단입니다.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거인족과 싸워서 이길 수 잆다는 현실이고 정확한 진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은 것은 현실의 불확실성이 확실하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미늘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미 13:32-33)’
다수는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이런 상태로 전쟁을 시작하면 질 게 뻔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메뚜기 같이 별 별일 없는 자들이라고 자기 자신을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리고 있는 결론 중에는 그들의 상상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도 독심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상상력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 또한 다수가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다수는 자신이 본 것을 보고했을 뿐 아니라, 악평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평은 사람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다수의 의견을 듣고 슬퍼했는지가, 민수기 14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그리고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의 내용을 들어보면, 모두 다 상상력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 14:2,3)’
고생 고생 하면서 왔는데 역시 그러면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겁 먹고,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애굽이 낫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서 싸움 하는 것보다, 애굽에서 종 살이 하는게 편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수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고백입니다. 또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확실한 일들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히리니..’ 얼마나 큰 믿음인 지 모릅니다. 현실을 보고 내린 정확한 결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경제가 봐도, 세계정세를봐도,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봐도, 망하는 것 밖에 없다, 죽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종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수의 의견이라고 말합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그 길로 가야 하는가? 그래서 우리 공동체로 가기로 결정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말합니다.
‘돌아가자’ 더 늦게 전에 돌아가자. 망하기 전에 돌아가자. 이렇게 서로 서로를 설득합니다. 이러헥서로에게 위로를 받습니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믿음일 것입니다. 돌아가면 나을 것이다는 믿음. 돌아가면 칼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돌아가면 애굽 사람들이 환영해 줄 것이라는 믿음. 돌아가면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고기와 밥은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자명합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인생을 가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정이 달라집니다. 믿음에 따라 광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라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믿음에 따라 가나안 땅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믿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아니, 어떤 믿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확실한 일들을 상상하면서, 그 일로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선택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력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면 그 약속대로 될까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다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보다는 자신들의 상상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요?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요? 깜깜한 밤 같지 않나요? 폭풍이 불어오는 날 같을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왜 이렇게 해석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이 주신 약속보다 우리의 경험과 다수의 의견과 우리의 상상력을 더 믿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3.
이런 다수의 의견과는 달리, 전혀 다른 생각을 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8,9)’
모든 사람이 인정한 것은 ‘가나안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메꾸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잘것없다고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보다는 자신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차피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점은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확인해 보고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리라. 그 땅을 주시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지 확인해 보자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한 한번은 해 보자는 것 아닌가요?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향해 진군하기에는 메꾸기 같이 초래하고 힘이 없나요? 맞는 말입니다. 메꾸기라고 생각하면 메꾸기가 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했으면 합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세상은 우리 밥입니다. 우리도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에게도 가나안 땅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땅이 ‘가나안 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보고, 다수의 의견을 따라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 다시 한 번 기도해 봐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 일이 우리의 현실만을 본 결정이었다면 말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면 말입니다. 미리 포기 하지 말라고, 미리 두려워하지 않아쓰면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죽을 목숨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대로 살다가 죽었으면 합니다.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어차피 죽습니다. 애굽에 가도 죽고, 광야에 가도 죽고, 가나안에 남아서 싸워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진해 보자는 것입니다. 멤피스 한인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고 지금까지 30년 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이렇게 믿고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죽기 전까지 믿음의 상상력을 살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 믿음의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붙잡고 그 믿음대로 살았으면 합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믿음대로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