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바울이 루스디아에 살던 앉은뱅이를 고쳤던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앉은뱅이를 고쳐주신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이랬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행 14:11)’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 있어요. 그리고 또한 아무리 기도해도 안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일들이 갑자기 될 때가 있습니다. 앉은뱅이로 살던 한 사람에게 갑자기 일어났던 일 같이 말입니다. 그 때의 반응이 중요한 것 같아요. 루스디아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루스디아 사람들이 오해한 부분이 있지만, 그들은 바울을 통해 이 일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하셨던 기적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로 포두주 만들기.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것.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지요. 5천명을 먹이셨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들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메세지는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라는 메세지입니다. 다른 말로 “임마누엘”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가운데 들어오신 사건이 일어났다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역사 가운데 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의 역사 가운데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역사 가운데도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도, 결국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버렸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았는데 말입니다. 이 일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의 노력도 아니고, 우리의 기도도 아닌 일이 일어날 때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함께 호흡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기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심을 다른 사람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삶에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우리 능력 밖이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참 신날 것 같아요. 그러면 이렇게 말하기도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 믿음 안에서 사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어떤 믿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루스디아에 살던 앉은뱅이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이런 일들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도 따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바울처럼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믿음 때문에 죽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이 믿음 안에서 사십시오’라고 말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지난 주보다 분위기가 험악합니다. 안디옥과 아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치는 장면 때문입니다. 안디옥에서 루스디아까지는 약 120ki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 먼 길을 오로지 바울을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이들의 열정이 대단하지 않나요. 사람을 죽이는데 이렇게 많은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는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 바울을 돌로 치게 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성난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바울을 상상해 보세요.
두 명의 증인이 나와 바울의 죄를 낱낱히 밝힙니다. 결국 바울은 정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여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다음은 이를 증언한 사람은 나와서 돌을 집어 바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것입니다. 돌에 머리를 맞은 바울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신호로 무리들도 바울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바울의 온 몸은 수 많은 상처에서 나오는 피로 새 빨갛게 얼룩지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서서히 정신을 잃어버리고, 돌을 던지던 사람들의 손길도 차츰 줄어듭니다. 이 정도 돌을 맞았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죽습니다. 죽은 바울의 시체는 동물의 시체처럼 부정하므로 성 밖에 버려졌습니다. 그의 몸은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의 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바울이 당한 일입니다. 그가 믿는 것을 믿으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도 바울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시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처럼 다시 살아난 후에도 ‘이 믿음 안에서 사십시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이쯤 되면 산 속에 들어가 조용히 살아야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도 바울은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나처럼 고생할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과연 예수를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예수 믿어 축복 받는 이야기, 예수 믿어 부자되었다는 이야기, 예수 믿어 대학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좀 해야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아요. 예수 믿어 죽은 사람들 이야기를 과감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매력이 좀 떨어지지 않나요? 신나는 이야기 보다는 어두운 이야기 같아서 말입니다.
저 같으면 바울과 같은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계속 이 일을 해야 될까? 이런 것을 참아내는 것이 믿음일까? 이쯤되면 그만 두라는 신호가 아닐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이 이렇게 싫어하는데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라고 말입니다.
제 말이 맞나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어요? 여러분을 향해 분노의 돌맹이가 날아오고, 증오의 돌맹이가 날아오고, 오해의 돌맹이가 날아오고, 심판의 돌맹이가 날아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몸을 상하게 합니다. 결국 여러분을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고통과 고난을 받았다면, 아예 숨어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더욱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원래 자신이 도망쳐 나온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 다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보이시나요? 바울처럼 고집이 세고, 미련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바울의 모습은 어쩌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바울과 같이 되면 우리 삶에 어려움이 올 것 같아, 아이고 도망가자’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그들이 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 아닌가요? 고생한다는데 사람들이 도망을 안 가니 말입니다.
바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돌을 맞는 현장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돌을 맞으면서 스데반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전하고, 돌에 맞아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옆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봤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정죄하고, 돌에 맞아 죽을만한 죄를 지었다고 믿었던 군중 속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보다 더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스데반처럼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기에 고난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돌은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바울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저들도 자신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구제 불능인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전한다고 돌에 맞고 있지만 바울의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이유입니다. 돌에 맞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식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은혜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들이 그의 삶 가운데 있었는데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만일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바울 자신도 120km 떨어진 곳보다 훨씬 먼 곳에 있어도 분노와 미움을 정의로 포장한 채, 루스디아로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이고 의기 양양해져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누가 승리했나요? 바울을 죽인 사람들이 숭리의 축배를 마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다 죽었다고 했지만, 바울은 살아났습니다.
돌을 던지는 사람과 돌을 맞는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을 겪음으로 더욱 담대해 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주의 십자가를 더욱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돌에 맞는 경험은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의 제자들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권면한 이유입니다. 마음이 약해지면 넘어지기 십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시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마음이 정금과 같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을 보았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지난 주에 식사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열심히 하신 분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시면 누군신지 금방 아실 겁니다.
“기독교의 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은 약해 빠진 것이 아니라, 악보다 훨씬 강하다. 왜냐하면 선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선은 악을 이깁니다. 선은 악보다 강합니다. 돌에 맞아 죽은 것 같은데 다시 살아난 바울처럼,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이지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을 우리가 또한 배워가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바울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